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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을 만드는 하인리히의 법칙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6. 6.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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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각광받는 직업은 아마 프로파일러나 심리분석가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이들의 활약(?)이 남다르다. 공중파의 시사프로뿐만이 아니라 종편의 뉴스채널까지 출연하면서 자신들의 전문성을 잘 살리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활약이 반갑지만은 않은 것은 왜일까. 최근에 갑자기 한국이 위험사회에 직면했는지는 몰라도 묻지마 범죄가 연달아 발생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된 큰 사건으로만 본다면 강남역에서 여성을 살해한 신학원, 동거남을 살해한 조성호, 수락산 살인의 김학봉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문제는 언론이 편가르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를 나누고 계층과 계층간의 갈등을 부추긴다. 본질적인 문제는 이런 인간성이 무너지는 자살폭탄들이 언제든지 주변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런 묻지만 살인이 발생하기까지 수많은 문제가 본인에게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버트 윌리엄 하인리히(Herbert William Heinrich)가 발견한 법칙인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에 따르면 큰 사고 한 번이 일어나기까지 작은 재해가 29회, 조짐이 300회정도 일어난다고 통계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인리히의 법칙은 비단 대형사고뿐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적용이 된다. 한 사람의 인성이 무너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일들이 그사람에게 있었을 것이다. 어떤이는 단순하게 말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거 하나 참지 못하고 그런일을 했다는 것은 어쨌든 간에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런 쓰레기들은 이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하던가 사형시켜야 한다. 


세월호 사건에서 보듯이 수많은 징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재해재난 방지 시스템은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물며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일까지 컨트롤하는 것이 가능할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은 하지만 정말 쉽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은 공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근미래를 볼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면 모를까. 결정적인 살해사건이 일어나기전까지는 사적인 영역이다. 비로서 살해사건이 일어나면 그 다음부터는 공적인 영역에 해당이 된다. 


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살해사건은 우연히 또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발생하지 않는다. 원한에 의한 것이든 이번 사건처럼 묻지마 살해사건이든지간에 반드시 경미한 사고들이 반복이 된다. 솔직히 300번의 경미한 징후까지 안다는 것은 그 사람과 동거동락하지 않는 이상 절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29번의 충돌들은 주변 사람들도 느낄 수 있다. 보통은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 않는 이상 신경쓰지 않는다. 그건 사회가 해주어야 할 일이다. 극단적인 방법외에는 해결할 길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사회라는 울타리속으로 끌고 오는 일 말이다. 


예를 들어 조성호 사건만 보더라도 개인적으로 볼때 수백번의 징후가 있었고 크고 작은 다툼이 끊임없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어떤 여성을 만났는지 모르지만 금전적으로 많은 손실이 있었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져갔던 것은 사실로 보여진다. 개인적으로 불운에 불운이 겹쳤고 옳바른 행동이나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40세의 남자와 같이 동거를 시작했다. 그 남성이나 조성호 본인으로 볼 때 큰 사건인 살해가 일어났다. 그 남성의 경우 조성호에게 어떤 다툼들이 있어왔는지 알지 못했고 결국 희생자가 되었다. 


개개인마다 능력이 다르고 정신적인 역량도 천차만별이다. 나라면 이렇게 하겠다라던가 참을 수 있는 일이라고 단언하기 힘들다. 문제는 법적으로 극형으로 처한다 치더라도 그런 사건이 줄어들거라는 생각이 안든다는 것이다. 무고한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막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지 희생자가 발생하고 나서 가해자를 극형에 처하는 것은 사후약방문에 불과한 일이다. 유일한 선택지가 그것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다른 선택지를 생각할 여력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선택지를 제시해주어야 할 제3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제3자는 그사람의 주변에 있는 이해관계인이 아니어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가족이나 친한 친구의 말은 잘 귀담아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말해준다고 해도 주관적이라고 받아들인다. 


또 하나 이 세 사건의 공통점을 보면 경제적인 문제가 엮여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사회에는 미디어도 상당히 발달되어 있고 각종 SNS등으로 인해 정보가 넘쳐난다. 사람들이 많이 퍼나르는 정보는 대부분 자극적이다. 실제로 주변사람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데 모든 사람들이 잘사는 것 같고 자신만 패배자가 된 느낌이다. 이 사회에서 자신이 발을 디딜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고립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경제적으로 문제있고 누군가에게 피해망상에 쩌들어서 숨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가계 평균소득을 통계내고 1인당 GDP는 열심히 발표하지만 정작 중요한 안전을 다루는 데에는 소극적인 것이 우리 사회다. 자신을 공격하는 300번의 사소한 징후는 사실 어떤 이들에게는 징후로 생각되어지지도 않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있고 누군가와 소통도 안하고 경제적으로까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욕하는 것 같고 무시하고 심지어 인격살해까지 당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언제까지 살인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문제점을 찾고 자극적인 제목으로 기사를 뽑을 것인가.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걸 특정성별의 문제라던가 사회적 약자의 문제로만 몰아간다면 제2, 제3의 희생자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윈도우 운영체제에서 단순하지만 꾸준하게 사랑받는 게임중에 '지뢰찾기'라는 게임이 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지금 활성화되지 않은 지뢰들이 사회 어딘가에 묻혀 있을지 모른다. 오늘 혹은 내일, 한달, 1년을 밟지 않았다고 해서 자신과 무관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당장 누군가를 추모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괴물을 만드는 하인리히의 법칙을 중간에 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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