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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서 만난 서양인 하멜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6. 4. 2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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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루기 한 번쯤 안들어본 사람은 드물겁니다. 

네덜란드 사람인 하멜이 어떻게 하다가 조선땅에 오고 무척 고생하다가 돌아갔다는 이야기죠. 

청나라를 꼭 정벌해보겠다는 효종의 과욕덕분에 외국인인 하멜일행들이 조선에 발이 묶였던 것이죠. 




네덜란드 하면 풍차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곳 하멜기념관에 오면 가장 먼저 눈에 띄이는 것이 풍차입니다. 



당시 서양의 과학은 상당히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북벌을 한다는 명분아래 국고를 탕진하고 백성들의 삶을 점차로 피폐해져갔다고 합니다. 당시 하멜의 눈에는 조선 백성들이 어떻게 보였을 까요. 



하멜이 왜 여기에 있었는지와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하멜은 미래에 중국시장 개척의 교두보로 활용하기 위기 조선과 직교역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억류당해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13년동안 억류됩니다. 이후 탈출하여 보고서를 쓴 것이 하멜표류기입니다. 


하멜기념관 옆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헨드릭 하멜은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호르큄에서 1630년에 태어납니다. 이후 세가 커져가는 동인도 회사에 1651년에 입사한 뒤 서기로 근무하게 됩니다. 당시 꿀보직이면서 중요보직이었던 서기로 일하던 서기는 해양개척과 무역정책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하멜과 그의 동료들을 기억하며가 가장 먼저 나오네요. 


하멜과 일행은 타이완까지 갔다가 일본의 나가사키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풍랑을 만나 좌초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제주도 모슬포 근처였습니다. 



일본의 유명 여행지인 하우스텐보스가 네덜란드의 분위기를 그대로 표현했는데요. 이곳에 와도 살짝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멜이야기뿐만이 아니라 하멜이 살았떤 동시대의 예술동향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멜은 제주도에 좌초되었다가 제주 목사 이원진에 의해 체포가 됩니다. 



생활자체가 달랐지만 하멜은 초기 9개월동안은 비교적 좋은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멜은 네덜란든 사람이었던 박연을 만나게 됩니다. 


일본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청화백자를 볼 수 있네요. 네덜란드 사람들도 청화백자를 무척이나 좋아했나 봅니다. 



당시에는 바람을 이용해 항해하는 이런 범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멜은 제주도를 떠나 한양으로 이송되었지만 청나라의 눈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이들을 보냈지만 그 중 두 명이 명령을 어기고 청나라 사신을 만나는 바람에 곤장을 맞고 유배형을 받고 강진으로 오게 됩니다. 



항해를 하는데 있어서 술이 빠질 수는 없겠죠. 캐러비안의 해적 같은 영화를 보면 술통에 빠져사는 잭 스패로우가 나옵니다. 



전라도 강진까지 유배온 하멜은 민가에 수용되어 병사들에게엄중한 감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무려 7년 동안이나 이 곳에서 머물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됩니다. 효종에 이어 현종이 즉위한 때에 천재지변이 일어나 수많은 백성이 죽고 자신의 동료들이 죽는 것도 봐야 했다고 합니다. 



생활이 별로 좋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강진 병영성에서의 제초 작업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작업에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의 전통신발인 클로그도 있습니다. 


나무로 만들어서 무척이나 불편할 것 같은데 당시 네덜란드는 아열대 기후라서 이런 신발이 기능적으로 잘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도기 접시들입니다. 



하멜은 계속 동료들이 죽어나가자 결국 탈출을 결심합니다. 하멜 일행은 여수로 이감된 후 그곳에서 경비를 피해 해안을 벗어나는데 성공을 합니다. 일본에 잠시 억류되기도 했지만 결국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하멜이 쓴 보고서로 인해 조선은 유럽에 알려지게 된 기회가 되었지만 조선은 잘 활용하지 못하고 18, 19세기로 이어지던 서구 열강의 세계체제 속에 난학과 양학을 섭렵한 일본이 앞서나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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