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이 문제가 되는 일자리는 정규직 보장이 되어 있지 않은 시간제 일자리이다. 경비업, 청소업, 편의점, 커피숍, 패스트푸드업체, 이미용업계 등 대부분 기술이 필요하지 않고 필요하더라도 배우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문제가 야기될때마다 언론은 마치 이들을 대변하는양 그들의 입장을 방송하지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리고 임금 근로자 역시 현실을 직시하고 개선하려기 보다는 이 사회가 잘못된 것이려니 하고 사회탓을 한다.
내가 최초로 돈을 벌어본 경험은 초등학교때로 돌아간다. 용돈같은 것은 전혀 없었던 그때 오락실에서 게임하는 돈을 벌기 위해 폐지줍기?..그건 아니고 폐전선을 태워서 구리를 고물상에 가져다주고 푼돈을 조금 벌었던 경험이 전부다. 이후 집에서 기둥역할을 하셔야 할 부친께서는 지병으로 인해 제 역할을 못하시고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차비가 필요했는데 3학년때 받은 용돈은 한달에 20,000만원이었다. 학교와 집과의 거리가 조금 되던터라 갈아탔어야 했는데 당시 승차권의 가격이 100원으로 만약 갈아타면 한달에 10,000원(100원*2*2*25)이 고스란히 들어가야 했었다. 지금처럼 환승이나 지원해주었으면 좋으련만 타는 족족 돈을 내야 했던 그때..마지막 환승은 피한다면 1km걸어가는 걸로 5,000원을 절약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당시 학교 재단의 재정이 좋은편이어서 8등까지는 3개월마다 내는 기성회비(?)가 면제되었다. 다행히 3년동안 면제받고 다녔는데 이건 순전히 어머니와 어느정도의 딜을 하기 위해서 열심이 한거라고 볼 수 있다. ㅎㅎ 그래도 먹고 싶은 것도 많고 사고 싶은것도 많았던 그때 누구나 가지고 싶다는 아XX나 르XX, 프로XXX,같은것은 꿈도 못꾸었다. 고3때 좋은 기회가 왔다. 옆 건설현장에서 특별하게 고등학생에게 일요일에 일할 기회를 주고 25,000원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육체노동이라는 것을 처음해봤다. 일을 하고 받은 그돈으로 집에 머좀 사가고 조금더 모아서 아XX 신발을 사서 신었다. 당시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가 입던 옷을 그대로 입게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 옷은 무척 세련(?)된 옷이었다. 그런데 옷이 클 뿐더러 홍석천이나 어울릴만한 옷이었다는 사실이다. 괴상망측한(?) 옷을 입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무한 긍정마인드(챙피하지만 안 챙피한척..그땐 심리학자 아들러도 몰랐다)가 아니었으면 학교를 때려치고(분명 어머니는 나를 공장에 넣었을 것 같다) 검정고시를 준비했을 것이다.
지금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20대에 했던 아르바이트들이다. 그것도 20대 중순까지가 대부분이다.
아르바이트 1기 : 육체노동과 예식장 알바 -> 대학교 1학년
방학때 조금씩 노가다라고 부르는 육체노동을 하고 주말에는 예식장에서 비디오 알바를 할때다. 지금이야 개나소나 모두 예식장에서 촬영을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비디오 카메라는 무척 비싼 장비로 신혼부부들이 예식장 계약시 필수로 들어가돈 옵션이었다. 당시 100,000원정도였던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난 얼마를 받았냐고? 평균 토~일요일 Full로 일하면 6~8쌍을 찍었다. 거의 편집을 안했던 그때에는 영상을 찍는것이 작업의 90%에 가까웠던 때다. 즉 평균 700,000원어치의 매출을 올리는 나에게 떨어진 것은 30,000원(2일치)정도다.
내가 예식장 아르바이트일을 처음 시작한 것은 어학계열을 다니던 1년 여자선배를 통해서였다. 썸도 조금 있었으며 지금 생각해보면 꽤 괜찮은 여성이었는데 난 왜 당시에는 관심이 없었을까. 나에게 조금씩 어필하던 여성이 적지 않았는데(그렇다고 해서 내가 꽃미남이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때 이성에 대한 뇌수준은 중학교 수준에 불과했던 것 같다.
어쨌든 계산해보면 매주 주말 9:00 ~ 15:00 식사제공 후 일당 15,000원 -> 식사시간 제외하고 시간당 3,000원이다. 나쁘지는 않았다. 그때 커피숍의 시간당 급여가 1,500원정도(최악의 사장인경우 1,200원도 줬다.)였으니 차이가 적지는 않았다. 기술을 조금 요한다는 것때문에 프리미엄을 받은 셈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았던 것은 집에서 자주 먹기 힘든 갈비탕을 무한대로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식욕이 한참 왕성하던 그때 일을 하고 먹는 4~5인분의 갈비탕은 일당보다도 더 매력적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돼지는 아니다.)
육체노동(노가다)은 잘 걸리면 좋긴 했지만 대부분 힘들었다. 특히 벽돌짐이나 모래통짐을 지는 일이 걸릴때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생각날만큼 시간이 매우 천천히 간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왜 벽돌짐을 등에 지고 2~3층으로 올라갈때는 시간이 빛의 속도에 근접하여 물리학적으로 느려지는 것만큼 답답하게 느리게 갔다. 그리고 받았던 일당이 40,000원 정도...
아르바이트 2기 : 육체노동과 풀무원 식품 -> 2학년에서 군입대전
지금이야 2년이 안되서 군복무가 끝나지만 당시에는 애매하게 걸려서 보통은 3년을 잡았다. 즉 앞뒤로 남는 시간이 있다는 말이다. 건설업체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증이 있었던 나는 산업체에서 대체복무가 가능했던 그런 아주 좋은 제도가 있던 사실만 알았으면 혹시..군대를 안갔을지도 모른다. 2학년을 조금 다니다가 휴학계를 낸 나는 가끔 예식장 촬영도 나갔지만 본격적인 쌩 노가다의 세상으로 흘러들어갔다. 당시 어머니는 방학때나 휴학을 하면 최저활동비(?)조차 주지 않아서 친구들과 만나는 것은 고사하고 걸어갈 수 있는 5km 반경을 넘어가면 도저히 어디를 갈수가 없었다. 당시 대학의 낭만이라는 외상도 한두번이지..더이상 단골 호프집을 갈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매일 술을 푼것은 아니다. 말이 그렇다는거지)
군대가기전에 통장에 어느정도 목돈(?)을 만들어놓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간간히 육체노동을 하다가 알아보던중 풀무원식품 대전 물류센터에서 군대가기전까지 6개월 가량 일할 기회를 얻었다. 11:00 ~ 02:00 간식제공 후 15,000원 -> 시간당 5,000원이나 받는 좋은 일자리였다. 그 짦은 시간에 끝내기 위해서 겁내 열심히 일해야 되고 15단정도를 쌓으면 앞이 안보인다는 점을 제외하면 시간당 급여가 나쁘지 않았다. 내친김에 젊은 몸을 무기로 한 두어주를 낮에 육체노동을 하고 밤에 물류센터에서 일해봤는데...이건 사람이 할짓이 아니었다. 10일쯤 넘어가자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래서 포기했다. 그냥 풀무원식품을 선택했다. 그러다가 군대갔다.
아르바이트 3기 : 하스리, 국정교과서, 주차안내, 지게차 -> 제대후 복학전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약 5개월하고 20여일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역시 어머니는 변하지 않으셨다. 일하지 않는자 아니 공부하지 않는자 먹지도 말아라라고 했던가? (그냥 내가 알아서 선택했다) 제대하고 3일째 부터 일을 시작했다. 처음 일한 것은 백화점 주차안내였다. 운전할줄 알았어야 했고 수신호도 어느정도 이해했던 그런 유능한(?) 경력자가 필요했다. 때론 빵꾸도 때워주고 바퀴까지 갈아준 적이 있다. 한 2개월쯤 일한 것 같은데 일당 35,000원으로 시간당으로 따지면 4,000원정도가 된다. 당시 외모를 담당했던 여성들은 몸매나 얼굴이 조금 되는편이었다. 이때 부터 진심으로 여성에 조금씩 관심이 가던때였다. -> 이때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다음에는 한달정도 일했던 바닥뜯어내기 (일명 하스리)였는데 장비를 이용해 잘못 시공된 바닥을 들어내는 일이었다. 당시에 노가다라고 부르던 육체노동이 50,000원정도였는데 이건 70,000원이나 되었다. 돈 준만큼 고생한다는 말을 아직 몰랐던 것이다. 한달정도를 하고 그만두었는데 따지고 보면 시간당 7,000 ~ 8,000원이나 되는 상당히 고임금에 속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육체노동의 여파는 4년을 넘게 갔다. 손가락 관절마다 고통이 따랐고 제대로된 분진 마스크 없이 일했던 그 여파가 나중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아직도 모르는 상태다.
다음에 얻은 아르바이트는 보름정도 일한 LG화학에서의 지게차 운전이다. 군대에서 특수차를 운전해본 경험때문에 지게차만 운전할줄 알았는데 대리점마다 주문한 물량은 만들어서 쌓은다음 그걸 1톤짜리 차량에다가 가져다 주는 일이다. 아르바이트로 일하려고 갔는데 지게차 운전은 가끔이고 대부분은 정직원이 부르는대로 비누며 치약이며 샴푸며 이런것들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허리를 굽혔다가 폈다가..열심히 쌓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만약 다른 알바자리가 구해진다면 그만두고 싶었다. 지게차는 그냥 가는데 빠레트에 정신없이 쌓다가 한 품목이라도 빠지면 욕먹기 쉽상이었다. 다행히(?) 보름만에 이것보다는 덜 빡쎈 국정교과서 일을 찾았다는 것이다. LG화학은 월급제였는데 굳이 시간당 급여로 따진다면 4,000원정도 였던것 같다. 근데 왜 샴푸나 치약 한통도 안준거지?
마지막 두달은 국정교과서에서 일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국정교과서에서 방학때마나 계약한다음 Case By Case로 돈을 받은 업자 밑에서 일한 것이다. 시간당 급여로 따진다면 6,000~7,000원정도였고 초.중.고 교과서를 개학하기전에 가져다 놓는 일이었다. 1주일에 한번 정도 물량이 내려올때 5,000박스정도를 분류하는 그때만 제외하면 나름 할만했다. 정말 힘들때는 초등학교 저학년 책들이 무더기로 내려올때다. 슬기로운생활, 바른생활 같은 아주 빳빳한 책들은 돌덩이 같았다. 그걸 분류하면 어께가 부서지는 느낌이다. 고등학생들의 책은 정말 가볍다..그런데 왜 책의 무게는 가벼워지는데 공부의 무게는 무거워지는지 모르겠다.
아르바이트 4기 : 대리석 외장 작업, 백화점 의류매장, 그리고 등등 -> 복학후 졸업때까지
지금도 건물의 외장을 대리석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리석으로 마무리는 비계를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봉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고소공포증이 있으면 절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다. 대리석 사이에 완충제를 넣고 그 위에 건으로 쏘아서 마무리하는 것이다. 60,000원 정도 받았고 따져보면 시간당 7,000원 정도다. 2개월정도 했는데 당시 그 일과 병행했던 것이 바로 대덕테크노벨리의 연구소들의 버티컬 설치하는 일이었다. 버티컬 설치하러 갈때는 참 편했는데 건물의 외장 마무리하러 올라갈때는 심리적으로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난 절대 고소공포증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방학때마다 알바를 하긴 했는데 유일하게 안했던 시기는 4학년때였던것 같다. 3학년초 겨울방학과 여름방학때 백화점 브랜드 의류매장 재고관리 및 납품일을 했다. 자가용이 있었어야 하며 컴퓨터를 잘 다루었어야 했다. 그리고 여러개의 백화점의 매장담당과 커뮤니케이션 하는것...4개월 30,000원 -> 시간당 5,000원을 받았다. 만약 리터당 휘발유가격이 최고로 치달아서 2,000원정도 했던 때라면 바로 때려쳤을 것이다. 그때 나의 차는 소형차였고 유가는 1리터당 700원대여였었으니 다행이지 싶다.
이거 말고도 몇일에서 1주일 혹은 간헐적으로 했던 일들은 5~6가지정도가 더 남은듯 하다. 그중에서 기억나는 것은 피아노 콩쿨제를 써포트했던 일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음악을 한다는것..그리고 피아노를 가르치는 부모님들은 이루지 못하는 그런 꿈을 꾸고 살고 있는지 현실을 접하게 된 것이다. 사실 그걸 원해본 적은 없다.
다시 최저임금문제로 돌아와서 내가 일할때만 하더라도 커피숍이라던가 몸이 조금 편한일들의 시급은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다.
대학교 1학년 ~2학년때에 조금(사람에 따라서 다르다) 힘든 일을 하면 시간당 5,000원정도를 받을 수 있었는데 호프집이라던가 커피숍은 1,500 ~ 2,000원을 넘지 못했다. 사회는 생각보다 더 냉정하고 냉혹하다. 능력보다 과하게 받는 기득권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소자본을 가지고 운영하는 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은 기득권층이 아니다. 그러나 방패막이로 삼는 것은 이들이다. 달콤한 과실은 나누어줄생각은 없으면서 임금상승 억제의 타당성을 그들에게서 찾는 것이다.
나는 소신(? 아주 가끔 후회될때가 있다. 머리쓰는일을 할걸)이 있었다. 젊을때가 아니면 다양한 직업에 대한 체험을 할 수 없고 힘든일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을..그럼 그사람들의 입장을 안다고 해도 그건 흉내일뿐이다. 모TV 프로 진짜 사나이를 보고 불쌍하네..대단하네..이런 말을 하는 누군가 있다면 어벤져스의 배우들을 보고 그들의 능력을 감탄하는 것만큼 허황된 것이다. 스타들의 1일체험(여러번 봤다)도 정말 쇼다. 모든 것이 셋팅되고 아주 잠깐 힘든척한다.
공부는 평생할 수 있지만 정말 힘든일은 평생 유지하기 힘들다. 바리스타, 메이크업, 헤어디자이너 (말이 좋아 디자이너지...일부 예술적 감각이 있는 사람제외), 편의점 알바, 경비, 호프집, Bar 등 진입장벽이 낮은 일들이 있다. 진입장벽이 낮다는 것은 사람이 많기도 하지만 심리적, 육체적도 포함이 된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기 때문에 주도권은 고용주에게 간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삶의 수단으로 그 직업을 선택했을 뿐이다. 특히나 젊음때 삶의 길은 한 방향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몇개월 전 백화점 주차 알바와 손님의 갑질이 사회적으로 비화될때가 있었다. 난 그 아르바이트생이 답답했다. 나도 경험이 있는데 그만든 이유가 백화점 상무(?)의 부당한 갑질에 항의하고 바로 다음날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일있다 전화가 왔다. 일해달라고(일시키면서 엿먹이려고 그랬나?) 젊다는 것은 다양한 일에 도전할 기회가 많다는 의미도 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머 이런 시덥잖은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적지 않은 경험을 했고 그중에서 비교적 쉬운 아르바이트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상당수의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일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최저시급은 왜 문제가 되는가를 보면 대부분 몸이 덜 힘들던가 별다른 기술이 필요없거나 배우기 시작한 직종들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우리는 같이 바라보고 있다.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고 최소의 근로를 제공하면 기본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살기에 아직 한국은 덜익었다. 최저 임금 10,000원은 한국 대다수의 국민이 성숙되고 제대로된 정치인을 뽑으며 약자도 배려할 수 있는 세상이 올때 진정한 그의미를 찾을 수 있을듯 하다.
생각해보면 군복무와 4학년 학업을 할때를 제외하고 대부분 주말, 방학이나 휴학기간에 아르바이트를 쉬어본 경험이 없다. 만약 학점을 물어보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보내줄(괜찮은 수준이다) 수 있다. 분명한건 참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다. 솔직히 즐거웠다 일하면서 흘리는 한 방울의 땀도 힘든 일을 할때 시간이 무한대로 느려지는 것을 느낄때도. (근데 언제까지 열심히 뛰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어제는 영화 암살 영화평으로 브런치에 메인에 올라갔고 오늘은..최저임금으로 올라갔네요. ^^
'제품체험단 및 삶이야기 >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K9자주포.K2전차, 주한미군이 필요한 이유 (0) | 2015.07.30 |
---|---|
대전은 블로그 기자단이 왜 두개인가? (0) | 2015.07.28 |
브런치에서 접한 카카오톡채널의 트래픽 (0) | 2015.07.09 |
네네치킨 노무현 희화화광고, 비상식이 상식같은 세상 (0) | 2015.07.02 |
거부권 행사 박근혜 대통령 신의 한수? (0) | 2015.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