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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고려문과 덕혜옹주 이야기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8. 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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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에서 옹주는 중전의 자식이 아닌 첩실의 자식이다. 중전의 딸이었다면 공주로 불리웠겠지만 덕혜옹주는 그렇지 못했다. 조선의 마지막을 끝까지 바라본 덕혜옹주는 일본에 의해 도쿄로 보내져 일본 황족들이 공부하는 학교여자 학습원에서 수학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일본에게는 인질과 같은 개념이었다. 덕혜옹주는 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인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하고 딸까지 보았지만 조울증, 우울증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했다고 한다.

 

1855년 백작 소 다케유키와 이혼하고 1962년에 대한민국에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 거주하다가 1989년에 사망하였다.

 

 

 

 

이 고려문은 대마도 번주가 살던 '사지키바라'성이ㅡ 제3문으로 조선과의 선린 외교를 위한 영빈문으로 사용되었다.

 

대마도는 일찍이 조선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본토인 일본보다 가까운 한반도는 그들의 부족한 식량과 자원을 보충하고 무역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던 것이다. 특히 일본 본토와의 중계무역을 통해 이들은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12년 조선왕조 26대 고종의 딸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1925년 일본에 끌려가 1931년 쓰미마 도주의 후예인 다케유키 백작과 강제 결혼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딸이 있었는데 눈 앞에 보이는 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건립되었으며 이 비는 2001년에 새로 복원된 것이다.

 

 

대마도의 주요세력은 무역으로 멀고 살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일본인들은 해적질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마도는 쌀을 생산할 수 없는 땅이기 때문이다. 대마도가 본격적으로 부상한 것은 임진왜란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조선정벌에 앞장서면서 부터이다. 중계무역으로 잘 살수 있는데 굳이 무역대상인 조선을 정벌해봤자 실만 있을뿐 득은 없었을 것이다.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창출했던 유럽 지중해의 베네치아정도는 아니더라도 꽤 짭잘했을 것이다.

 

 

이왕가의 자손인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는 비..

 

살짝 돌아서 올라오면 고려문이 내려다 보인다.

 

 

이 조선통신사비는 조선시대 후기 한일간 조선통신사 친선 교류에 공로가 컸던 일본의 유학자 아메노모리호슈가 주창한 외교원칙 '성신지교린'을 기리는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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