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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에서 제주까지 세상을 간직했던 추사 김정희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4. 11. 2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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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는 역사를 배울때 있어서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중 한명이다. 예산출신 인물중 가장 유명하기도 하며 왕실과 혼인했던 이력때문인지 유명세가 남달랐던 것도 사실이다. 김정희의 흔적을 처음 만난것은 제주도에서였다. 추사기념관이라는 곳이 예산에 위치해 있지만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도 만날 수 있다. 

 

예산에서 태어나 승승장구하다 제주도에 유배된 후 자기만의 길을 완성했다. 제주에서 그린 세한도는 지금까지 그 유명세를 더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뛰어난 문신이자 서화가였으며 금석학자였던 추사 김정희의 흔적을 찾아본다.  

 

금석학자였던 추사 김정희가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를 연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황초령 순수비는 신라 24대 진흥왕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회복하고 순수한 것을 기념하기 이ㅜ해 568년에 세운 비석이다. 진흥왕의 4개 순수비 중 가장 먼저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정희가 본격적으로 연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예산의 추사기념관에 가보면 이렇게 제주도 유배지 모형을 만나볼 수 있다.

실제 제주도에 가보면 이와 똑같은 실물이 자리하고 있다. 그가 제주도로 유배된 것은 헌종6년 윤상도의 옥사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가면 추사관이라고 있다. 1840년 10월 2일 추사는 대정 읍성 송계순의 집으로 유배되었다가 대정현 안성리 강도순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유배가 끝날 무렵에는 대정현 창천리로 옮겼다고 한다.

 

 

현존하는 추사의 집이 두개 있는 셈이다. 예산과 제주도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산의 추사고택만큼 위세가 있지 않지만 이곳 추사가 머물렀던 곳도 선비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집앞에 심어져 있는 소나무가 도도해보인다.

 

 

추사가 쓴 작품들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추사는 이곳 제주에서 백혜백, 강사공, 이시형등의 제자를 길러냈다. 추사는 제주 유배 시절에 수서노하를 아끼고 즐겼으며 끊임없이 책을 읽고 글을 썼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를 떠나 예산으로 가기전에 썻다는 작품으로 추사체의 완성을 목전에 둔것처럼 보인다. 추사체의 완성은 바로 이곳 제주도에서 9년의 유배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추사의 글은 이렇듯이 세련되면서 힘이 있다. 글씨의 강약과 대소, 역동적이면서 안정적인 구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힘을 느끼게 하면서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탱자나무로 둘러싸인 이곳의 추사의 거처는 적지 않은 제주도인들이 방문했을 것이다.

 

 

눌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벼, 조, 콩 농작물 또는 초가지붕을 잇는 띠를 단으로 묶어 동그랗게 쌓는행위를 말한다.

 

 

예산과 제주도는 생활환경이 상당히 달랐던 곳으로 추사 김정희는 초기에는 상당히 힘든 나날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친구인 권돈이에게 쓴 편지에 "기력은 점차 쇠진하여 가고 살이 빠져 이제 앉아있기조차 어렵다"고 할 정도였다.

 

 

제주도는 예전 방식으로 돼지를 키우는데 이곳도 옛날 흔적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5,000권을 읽어야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는 추사 김정희는 제주에서 책을 구하기 힘들었는데 제자인 이상적이 연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 조달해 주었는데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세한도를 그려서 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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