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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황선생 고택, 검소한 느낌에 빠지다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4. 10. 2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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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까지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인물 윤황은 사후에 영의정까지 추증된 인물이다.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52에 위치한 이 고택은 윤황 선생의 6대손 윤정진이 조선 영조 때 지금 자리로 옮겨 종가로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윤황 선생은 조선조 선조때 태어나 광해군 시대를 지나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얻은 인조17년 1639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다.  

 

윤황 선생의 고택은 ㅡ자형 사랑채, ㄱ자형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는 트여 있는 ㅁ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택의 구성은 안채, 사랑채, 광채 등 3채의 살림집과 사당 1채로 되어 있다.

 

윤황 선생 6대손 윤정진이 옮겨 종가로 내려오고 있다고 하나 파평윤씨 23대손이 윤황선생 30대손이 윤정진이라는 말이 있는것으로 보아 윤황선생 7대손이 맞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전면에는 ㅡ자형 사랑채가 6칸으로 자리하고 있다.

전면에 위치한 사랑채에는 다섯 칸이 있고 좌우측으로는 반 칸의 높임마루를 한 방이 위치하고 있다.

 

윤황선생의 고택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본관은 파평인 윤황은 자는 덕요이고 호는 팔송이다.

인조때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를 반대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유배의 명을 받았으나 삼사가 주청하여 화를 면하였다.

 

좌우측에 빈칸에 위치한 이곳은 반 칸의 높임마루를 한 방이 있다.

 

 

윤황선생의 호가 팔송인 이유는 그가 살던 곳이 남별영이 있던 곳으로 소나무 8그루가 둘러싸여 있고 샘이 있어 팔송정이라고 불렀는데 그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뒷편으로 돌아가보면 이렇게 배수로와 낮은 굴뚝이 배치되어 있다. 굴뚝이 이렇게 낮은 이유는 기능적인 요소가 반영된 결과때문이기도 하다. 온돌에 불을 지필 때 낙엽등을 이용하여 불씨를 만들었다. 처음 불을 지필때 연기가 많이 나는데 이 연기들이 굴뚝에서 나와 집안 곳곳에 병충해를 잡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곳 안채에 오면 정갈하면서 검소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 연출된다.

정면에서 보면 좌측에 부엌과 안방이 있고 ㄱ자형으로 꺽인 안채에는 대청, 건넌방이 위치해 있다. 윤황선생의 고택은 우측 맨 끝방에 높임마루를 둔곳이 특징이다.

 

 

 

새로쌓은 축대를 기준으로 우측에는 윤황선생의 사당이 위치해 있는데 제사등을 지낼때 사랑채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동선으로 구성하였다. 좌측의 안채에서도 사당으로 바로 접근할 수 있으며 그곳으로 통하는곳에는 일주문이 만들어져 있다.

 

뒤쪽으로 돌아오면 저 끝부분에 장독대들이 놓여 있고 근래에 쌓은듯한 축대와 계단을 만든곳에는 시멘트가 발라져 있다.

 

 

이곳은 윤황 사당으로 부조지전 편액이 있는데 정조가 부조묘를 세우고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윤황선생의 고택의 뒷편 언덕으로 올라가서 흐린 하늘을 한장 찍어본다. 탄핵을 받아 유배되기도 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의 검소한 느낌이 묻어나는 곳이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때에는 동부승지(승정원() 정삼품 벼슬. 여섯 승지() 가운데 끝자리, 공방() 맡았다), 이조참의(이조() 속한 정삼품 당상관() 벼슬. 이조 참판() 아래이다), 전주부윤(지방관청인 부(府)의 우두머리)를 지냈다.위세있는 요직은 아니었어도 지금으로 말하면 고위공무원이라 부를만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곳은 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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