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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육의 중심에 있는 향교를 찾아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4. 10. 1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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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교육이관이다.

역사가 600년이나 된 조선의 공립학교라고 볼 수 있다.

유교문화위에 설립된 교육기관인 향교는 조선시대의 교육열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유교문화와 교육이 결합된 향교는 지방의 사회질서에 대한 정신을 이어받았다. 향교는 충실히 교육기관으로 역할을 해왔지만 서원이라는 기득권들의 교육기관이 발달하면서 향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유교의 안좋은 이면이 고착화되는 것은 바로 그들만의 사설교육기관이 서원이 발달하면서 부터라고 볼 수 있다.

 

 

 

정산에 위치한 정산향교는 관아 서쪽 1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성현 27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의실인 명륜당, 유생들의 숙소인 통재와 서재, 삼문, 청아루, 전사청 등 7동의 건물이 남아있다.

 

 

정산향교를 가는길은 입구에 있는 홍살문을 지나면 이렇게 현판에 청아루라고 쓰여진 누각을 만나게 된다. 이곳을 지나면 동재와 서재가 있고 동쟁의 중앙 칸위에 봉양재라고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다.

 

 

국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하는 곳이 동궁이였다면 백성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지방에 향교가 있었다.  시스템적으로 동궁에서 교육하는 시스템의 상당부분을 향교에서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누각 정면에는 명륜당이 있고 뒤에 대성전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조부가 손자의 육아일기를 쓰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향교에서 교육을 받고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비법은 반복암기에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더운 여름날 항교에서 땀을 흘리며 공부를 했을 그들의 노력이 느껴진다.

없는사람들의 쇠퇴해가는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은 공부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나무는 보호수이다. 벌서 650년이 넘은 은행나무이다. 보호수로 지정된것이 1972년으로 나무둘레가 6.2m에 달한다.

 

 

조선향교의 교육과정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을 이 은행나무는 대를 이어가면서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공부하는 서생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세월이 흘러가고 성공이라는 것도 지나가는것이니 아둥바둥 공부하는 것이 부질없다고 바라봤을 것이다. 모든 가치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시간일지니..시간의 차원으로 보자면 인간이라는 존재역시 무의미할뿐

 

오늘날 향교는 일반 고등학교에 가깝고 서원은 과학고, 외고, 자사고에 가깝다. 서원이 활성화되면서 조선의 국운은 기울었으니 모든것을 가졌다고 해서 영원할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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