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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흥사지, 백제마지막을 지킨 아픔의 흔적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4. 7. 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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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흥사지가 위치한 곳은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 48 에 위치한 곳이다. 부여로 천도하여 사비시대를 열었던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이 창건한 백제 왕실 사찰이였다. 백바강 북쪽에 위치한 왕흥사지는 기단석만 남아 있는 절터로 사비시대의 중요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백제 무왕 36년에 "왕흥사가 낙성되었다. 왕이 배를 타고 절에 가서 행향했다. "고 적혀져 있다.

 

수많은 마한 소국중에 하나였던 백제가 고대 국가로 자리매김했지만 결국 나당 연합군에게 666년 패하였다. 왕흥사는 577년에 세워졌지만 660년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왕흥사잠성을 공격한 후 폐허가 되어 절터만 남게 되었다.

 

 

 

비록 폐허가 되어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지만 왕흥사가 중요한 이유는 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테라가 모델로 삼았기때문이다. 일본은 백제로부터 불교를 전파받았는데 불상과 불경뿐만 아니라 왕흥사를 모델로 아스카테라를 창건했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추정되는 이유는 양쪽 사찰 모두 불탑의 구조나 출토품이 유사하고 같은 기술자에 의해 세워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절의 흔적만 남아 있는 폐사지를 가보면 세월의 흔적도 느껴지면서 가슴이 아려온다. 특히 왕흥사지처럼 역사속에서 국가가 멸망하면서 폐허가 된곳을 보면 못다한 그들의 꿈이 떠다니는 느낌이다.

 

 

백마강을 바라보며 있었던 왕흥사는 독특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속에서 그 모습이 숨겨져 있다가 1930년 홍수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봄 2월에 왕흥사가 낙성됐다. 절은 강가에 위치했고 채색과 장식이 화려했다. 왕은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행향(行香)했다.”

 

왕흥사의 건립은 성왕의 죽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군 3만여명이 전사한 이 전쟁에서 위덕왕은 아버지에 죄책감으로 인해 적개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전쟁 일선에 나서게 된다. 전쟁에서 죽은 왕자들을 위해 왕흥사 목탑을 세웠으며  634년 무왕은 위덕왕에게 물려받은 왕흥사를 크게 확장해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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