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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에는 배신의 인물이 난다?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4. 5. 2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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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을 끼고 있는 도시 공주는 고려 태조 왕건이 배척하라고 지칭한 곳이라고 한다. 그 근거를 찾아가보면 훈요10조중 제8조에 나와있다. "차령 이남, 공주강 밖은 산과 땅이 모두 배역하니 사람 또한 배역한다. 조정에 들어오면 변란을 꾀하고 임금이 행차하는 길을 막아 난을 일으키니...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벼슬을 주지 말라"

 

공주강은 지금의 금강을 지칭한다.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바로 백제 땅이 시작되는 경계지점이다. 고려시대까지는 전라남북도를 호남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 비로서 호남이라고 지칭하였다. 그 시작점을 금강을 끼고 있는 공주를 지칭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전라도는 원래 백제의 땅으로 땅과 물이 모두 배역한다. 이후 고려 시대에 이곳 사람들은 등용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곳 금강을 끼고 있는 공주는 풍수지리상의 배역의 형태를 띄고 있다. 금강은 공주 부근에 오면서 개경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자세의 지형을 보이고 있다. 지리적으로 찾아보면 영남땅에서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풍수지리적으로 안좋은 곳은 비보풍수로 고쳐서 바꾸어 놓았다. 예전에 글을 쓴 적이 있는 개태사는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하고 지은 사찰로 모셔진 미륵석불은 손과 발이 유난히 크면서 의도적으로 남쪽을 바라보도록 배치되어 있다.

 

군사적 요충지인데가 많은 백성과 병사들이 죽었기 때문에 원혼을 달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사찰을 지어놓았다고 한다. 후백제의 기를 누르고 다스리려는 의도의 비보사찰이다.

 

 

 


훈요십조에서는 배역의 땅이라고 나와있지만 태조 왕건은 이 지역 출신들을 차별없이 등용해서 신임했다. 낭주 최씨의 시조라는 최지몽은 태조 왕건때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호남 인물이였다. 실제로 훈요십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8대 현종때라고 한다. 현종의 측근이였던 실록편찬자들에 의해 훈요십조가 알려졌는데 이때 참여했던 인물이 경주 출신들이다.

 

왕권을 강화하고 그들의 세력을 키우는데 신라계 인물들이 대거 기용되었고 때마침 훈요십조가 공개된 것이다. 시대적 상황에 의해 금강을 끼고 있는 공주를 경계선으로 배역의 땅으로 다시금 쓰여진 것이다. 현재도 남아있는 지역 차별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충청남도 공주가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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