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다(1000)/영화평(스릴러)

방황하는 칼날, 사법의 칼날보다 강한 분노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4. 4. 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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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사별하고 애지중지하던 금지옥엽을 잃은 사회적 사건들이 빈번해지고 있다. 뻔해보이는 이야기들이지만 사회적으로 합의되기 힘든 이야기들이다. 법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기에 직접 행동하는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헐리우드 영화처럼 속시원하지는 않다.

 

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과 사람사이에 공정함이 존재하였다면 법이라는 것은 무용지물일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도 다르고 상황마다 느끼는 상실감도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어떤 기준에서 보면 사형을 당해야 될것 같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다지 큰 고통이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의 자식을 잃었다고 하면 가해자의 목숨을 빼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마음속으로만 다짐해야 한다.

 

 

 

 

가해자가 더 행복한 세상?

 

이 사회는 생각보다 가해자가 법의 보호를 받는다. 피해자는 자유롭지만 가해자는 법의 테두리에 묶여 갇혀 지내는 존재이기 때문인지 법이 그들의 히어로가 되어 방패막이 되어준다. 문제는 피해자는 법의 보호를 받는 가해자를 보면서 무기력함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신체가 구속되지 않은 자유를 가졌을 뿐 심리적으로는 가해자보다 더 심한 감옥에 빠져있는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직접 그 가해자를 처단하면 어떻게 될까?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지만 결국 자신 역시 법의 잣대를 받아야 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쉽게 말하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강력범죄가 등장할때마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물리적 거세를 해야 되니 당장 사형을 선거해야 하니 이런 말들을 쉽게 한다. 그런 일련의 행동들은 사회적 공분만 불러일으킬뿐 어떠한 사회적 합의도 불러 내지 못한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인권을 가지게 된다. 설사 가해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처벌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의 제어막을 둔 것이다. 누구도 그 입장이 되지 않으면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자식은 소중하고 남의 자식은 소중하지 않은 것이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부모의 모습이다. 적어도 자신의 자식이 평안안 상태에서 다른 자식 혹은 사회에 관심이 가는 법이다. 용의자중에 사망자가 발견되고 나서 그의 부모가 경찰서에 와서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에서 다른 사람 자식의 목숨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극한 이기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감당되지 않은 정신에 원인을 제공한 남자를 죽인 뒤에 용의자를 찾아 강원도 산기슭을 찾아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에서 어떤 마음인지 궁금하기 까지 하다. 추적에 성공해서 찾으면 그를 죽일 생각이였을까? 소녀의 죽음속에 애도하고 좌절하는 그를 쫓는 경찰이나 용의자의 생명도 챙겨야 되는 경찰의 마음속은 복잡하기만 할뿐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히가시오 게이고의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미성년자라고 하면 법의 잣대는 물렁하기만 하다. 누군가에게 받은 범인이 사는 집주소가 담겨져 있는 문자. 그는 결심한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웠던 것이다. 법이 하지 못했던 일은 그가 하면서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고 법은 청소년을 보호해야 된다고 경찰을 압박하는 것이다. 법과 현실의 괴리감이 영화의 전반을 장악해가면서 어둡게 느껴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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