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 암살사건이 있는 후로 당시 부통령이였던 린든 존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공산주의의에 강경론자였던 린든 존슨은 1961년에 부통령으로 강경한 제안을 한 전적이 있다. 린든 존슨은 텍사스 주 군수산업 및 석유산업을 대변했던 기득권자였다. 텍사스 출신 6선의 상원의원으로 민주당 대선 경선중 케네디에게 패배한 후 부대통령을 맡았지만 케네디의 측근과는 정치적인 방향이 전혀 달랐다.
전쟁은 해결책이 아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10월에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인 일명 '쿠바 미사일 사건'에도 평화를 앞세우면서 해결했다. 이어 1963년 캐네디는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1,000명의 1965년 말까지 모두 철 국가안전보장행동각서 263호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기득권의 적이 되어버린 케네디가 텍사스 민심을 돌리기 위해 그곳을 방문하는 것은 최악의 수였을지도 모른다.
케네디 대통령은 재선후에 미군 완전철수를 선언했다. 케네디는 영민했기 때문에 베트남전의 실패할 조짐을 읽어내고 베트남에서 대참사가 진행중인 것을 눈치챘으며 자신의 재선이 그것때문에 물거품이 될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케네디는 민족주의적인 북베트남의 특성을 파악해서 차라리 중국에 대한 방벽을 세우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미국내 보수파의 눈밖에 난것이 사실이다.
케니디가 죽고나서 24시간동안 린든 존슨은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기 위한 모든 작업을 빠르게 진행했다. 그의 태도는 냉전의 산물이기도 했지만 그의 태도로 인해 미국은 베트남에서 전면적인 확전에 나서게 된다.
"나는 전쟁에서 패배하는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될 생각이 없다." 가 존슨의 생각이였지만 그 이면에는 군수업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에어포스 1을 타고 텍사스에 내린 케니디와 재클린 여사는 이날 있을 비극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만약 케네디 형제가 FBI, CIA, NSA를 모두 활용했다면 이날의 비극을 피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케네디가 존슨의 능력을 알았다고 하지만 그의 정치적인 성향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것이 사실이다.
린든 존슨의 성격은 직권을 남용하는 무한한 능력이라던가 권력과 연결된 탐욕스런 자아,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합리적인 반대에 대한 혐오감은 그를 케네디 측근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정치적으로는 어느정도 필요했지만 결코 갈 수 없는 길을 대통령과 부대통령이 걸어갔다.
린든 존슨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지만 저세상의 케네디와 살아있는 케네디에게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력은 있었지만 그들처럼 명민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22일 암살당했는데 그 다음해인 1964년은 제네바 협정 이후 미국이 남베트남을 떠맡은 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존슨은 케네디 측근들에게 굴욕감을 받으면서 케네디가 재선에 성공하면 자신의 정치적인 생명력은 끝이 나리라는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 한반도에서 벌어진 한국전쟁에서 성공적이지 않았던 경험과 미국인이 버티고 있는 베트남에서 프랑스가 실패했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힘과 신뢰성을 앞세워 밀어붙이면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린든 존슨은 그냥 밀어붙였다. 덕분에 한국은 베트남전을 통해 적지 않은 외화를 챙겨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올해 실시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 국민의 60% 이상이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 내린 정부의 조사 결과를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암살범으로 지목된 '외로운 늑대' 리 하비 오스왈드가 단독으로 범행을 치룬것도 그렇고 당위성도 부족했다.
암살 직후에 소련이 개입하였다는 음모설도 나왔지만 소련은 그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소련이 암살을 지시했다면 이후 오스왈드의 범행 배후로 드러날 가능성이 큰데 이는 곧 전쟁, 특히 핵전쟁을 의미한다. 오스왈드가 소련에 거주한 전력은 그를 모호한 음모론의 중심으로 몰아가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후 존슨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여 베트남에서 확실하게 손뗄기회도 있었지만 철저하게 군수업체의 입장을 대변해주었다. 전쟁의 승자이면서 평화의 사도를 동시에 원했던 존슨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였다.
결국 존슨은 재선을 완전히 포기하기에 이른다. 정치현실이 자신에게 안좋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자신의 인기가 땅바닥으로 추락했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골수까지 정치적인 인간인 존슨은 재선을 포기함으로써 극적으로 정쟁에서 몸을 빼냈다.
케네디 사후에 존슨이 보인 행동은 철저하게 이기적이였다. 린든 존슨은 대통령 취임선서를 위해 비행기 안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케니디 아내 재클린을 옆에 세워두길 바랬다. 사상초유의 취임식 뒤에야 케네디의 관이 실린 비행기는 이륙할 수 있었다.
미국의 강경 보수파와 군수업자들은 린든 존슨을 환영했다. 케네디 암살사건이 음모였던 음모가 아니였던간에 존슨은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린든 존슨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동안 케네디 암살 이후 3년 동안 암살 사건의 결정적인 증인 역할을 했을 만한 18명이 모두 사망했다.
케네디 정부의 바램이 그대로 존슨에게 이어지리라고 생각하는 케네디 측근은 많지 않았다. 일부가 그대로 진행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존슨과 그의 측근에 의해 수정되었다. 조사에 따르면 1993년까지 케네디 암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 중 115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아마도 FBI 국장중 가장 유명세를 가진 인물이라면 에드가 후버를 빼놓을수 없을듯 하다. 1917년 법무장관의 특별보좌관으로 들어가 1924년 5월 수사국 국장 서리로 임명되고 이후에 국장이 된 인물이다. 과학적인 범죄수사 연구소를 설립한것부터 시작하여 FBI국립 아카데미를 창설하고 특수훈련을 담당하기도 했다. 어떤 대통령도 그를 퇴임시키지 못할만큼 명성이 높았던 인물이긴 하지만 만들어진 업적때문에 다시 재조명 받기도 했다.
철저하게 정보조직을 활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끼치는데 이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는 프랑스계 미국인으로 태어나 신문기자로 일하다가 케네디와 결혼해 불과 서른둘에 영부인이 되었다. 그녀의 영부인 스타일은 필박스, 진주목걸이, 원색의 민소매 원피스,긴장갑으로 완성되었다. 다른 영부인과 달리 미국의 꽃이라는 패션으로 강인한 여성이면서도 다정한 어머니라는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한에 도착한 재클린은 자신의 초췌한 모습과 케네디의 관을 노출시키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존슨은 미리 기자들에게 연락해 공항에 모이도록 지시했고 새로이 대통령이 된 자신의 모습을 알리려고 했다. 물론 재클린은 케네디 관과 함께 존슨 몰래 공항을 빠져나갔고 존슨은 자신의 계획이 틀어진 것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존 F 케네디는 1964년의 오는 해는 맞이하지 못했다.
격동의 시기에 때론 정치력으로 때론 결단력으로 미국을 이끌던 그는 뼈속까지 정치꾼이였던 린든 존슨에게 자리를 내어주고만다.
하버드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2차 세계대전때는 해군 장교로 복무한 적이 있다.
1946년 29세의 마이로 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고 1952년에는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이토록 빠른 정계 입문의 후광은 바로 정치 명문가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금주법 시대에 약용주로 막대한 부도 쌓고 대통령 후보자에게 막대한 후원금도 지원했다.
어찌보면 린든 존슨은 군수업체등의 후원을 받아 교활한 정치꾼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실과 정치 명문가이면서 막강한 후광을 업고 있었던 케네디와의 괴리는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린든 존슨은 그를 부러워하면서 미워했을 것이다. 아쉬운것 하나 없이 자란 케네디가 국민을 위해 한다는 정치적인 행보는 그에게는 그냥 젊은 대통령의 환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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