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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세상 다 가질 수 있을까?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0. 7. 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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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녀는 리메이크작이다. 1960년대의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리메이크했지만 원작의 컨셉만 가져왔을뿐 내용은 거의 새로 구성한것이나 다름이 없다. 애로틱 스릴러를 표방한 기존작품과 달리 상류층의 생활과 그 아래에서 가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하층민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하녀라는 의미는 결국 조선시대의 노비나 다름이 없는 삶이다. 경쟁사회의 치열함대신에 조금은 숙이고 들어가는 삶을 택하는 하녀라는 캐릭터는 전도연의 백치미의 연기가 돋보였다. 멍청한것은 아니고 사회생활을 모르는것도 아니지만 욕망이라는것에 몸을 맡기고 그 같은 행동이 위험하다는것도 알지만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하녀속의 저택은 갇혀진 사회이다. 사회와 격리된 공간내에서 욕망과 물질에 대한 또다른 시각이 느껴진다.  

 

2010년의 사회 같지가 않다.

 

노트북도 등장하고 로봇청소기도 등장하지만 2010년이 아닌 과거를 바라보는것 같다. 마치 현대의 디지털기기가 고풍스러운 가구로 변신한것 같이 이질감이 느껴진다.

 

2010년을 알려주는 기준들은 자동차와 병원뿐이 안보이는데 물질적인 것의 분위기가 아니라 각 구성원들의 행동이 2010년이라고 느끼기에는 다분히 이질적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은이는 조그만 아파트지만 자기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혼 후 식당 일을 하면서도 해맑게 살아가다가 뜬금없이 상류층 대저택의 하녀로 들어간다.

 

국내 유수의 대기업의 직원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대다수의 직장인의 삶과 무언가의 동질감이 느껴지는것은 왜일까? 성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전도연이 말하는것처럼 '나 잘해요 뭐든지....'라고 면접볼때 떠들지 않았던가?

 

부동산 한채 있는것은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것을 말하고 싶었던것일까? 이들을 둘러싼 그들의 엇갈린 욕망을 그리고 싶었던건 걸까? 한국 사회는 돈에 대해서 어그러지고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듯 하다. 한국의 현재를 바라보면 돈이라는것은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 재 창출 되는 대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부동산 거품이 만들어졌는데 다들 문제라고 인식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거품이 꺼지면 대다수의 서민들의 삶이 피폐해져간다고 국내의 언론과 건설사들이 사람들의 불안감을 부추기고 있다.

 

2010년의 하녀는 자신의 삶을 조금더 편하게 만들고 싶었던 인물 은이와 비록 하녀로 일하지만 자식은 검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 병식, 상류층의 안주인처럼 행사하지만 결국 신분상승을 하고 싶었던 인물 해라와 해라모 역시 하층민의 삶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상류층은 다 가질수 있을까?

 

태어나면서 원하는것을 다 가진다는것은 상류사회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혜택이다. 일명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다는것을 하녀에서는 명확히 보여준다.

 

누가 한국을 신분제 사회가 아니라고 말했던가?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고 말하지만 쓸모가 없는 기회는 기회가 아니다.

 

대기업위주의 정책들은 국민의 세금을 가져다가 무한한 혜택을 주고 각종 언론등은 여기에 동조하면서 살아간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것은 상류층뿐이 없다는 것을 영화 하녀는 너무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음악을 감상하고 음식을 음미하고 미술품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의 눈은 삶의 여유가 있지 않다면 일반 서민들은 평생의 시간이 지나도 가지지 못하는 그들만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물질만 가지지는것이 아니라 사람까지 소유물로 생각하는것은 상류사회의 구성원들의 머리 깊숙한곳에 자리잡고 있겠지만 자본주의 사회라도 대부분을 가질 수 있겠지만 모든것을 가질 수는 없다.

 

여자들은 기분나쁠지도

 

이 영화는 하녀인 은이나 안주인인 해라를 통해서 여자라는것은 남자에게 귀속되는 그리고 자유의지라는것은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오로지 물질과 욕망에만 눈이 먼 캐릭터처럼 그린것처럼 보여도 실상 남자와 여자가 다른것이 없다.

 

하녀에서 모든 주도권을 가진 주인공이 훈이기 때문에 안주인인 해라도 그리고 해라모, 하녀로 일하는 병식이나 은이조차도 훈의 기준에서 똑같은 하층민일 뿐이다.

 

남자의 기준이 아닌 권력자나 상류층의 기준으로 바라봐야 되지 않을까? 이 사회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것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것은 하녀에서 너무나 여실히 보여준다. 치밀한 미장센을 통해 원작보다 더욱 농밀하고 스타일리쉬 한 에로틱 서스펜스를 선보였다고 하지만 어딜봐도(마지막에 조금은 있는) 서스펜스는 찾기 힘들었던 영화 하녀는 있는자와 없는자의 비대칭적이고 매우 불합리한 현실을 그리고 있다. 한국사회는 1960년도 그랬고 2010년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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