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개의 써포터즈중 하나인 학옥써포터즈 활동을 하러 전주를 방문해봤습니다. 한옥은 대전 주변에도 있지만 1박2일로 할수 있는곳이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나중에 포스팅을 하겠지만 그냥 알리기정도나 가능할듯 합니다. 이곳은 전주에서도 유명한곳으로 100년이나 된 고택입니다.
전주를 가게되면 역시 맛집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그것은 따로 포스팅하겠습니다. 전주여행의 1번지라고 하면 아무래도 전주한옥마을이겠죠? 한옥생활체험도 그중 하나인데 건축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건축기사를 공부했던 필자로서 보면 학인당에 들어서면 한 마디로 고택이라는것이 무엇인지 잘 알려줍니다. 물론 100여년 정도이지만 지금 그모습을 잘보존하고 있는 거주하는 집은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고택 전통체험관인 이곳은 고종때 영릉참봉을 지낸 백남중의 고택이다. 학인당..이곳을 가기전에 처음 들어본곳이지만 1박 2일을 하고 오니 예전의 그들은 가고 없지만 저는 그 흔적을 고스란히 느껴볼수 있는듯
지민이가 마침 잠자고 일어난지 얼마 안되서 짜증이 얼굴에 잔뜩 합니다.
문중이라는것을 알려주는 세로현판이 걸려져 있습니다.
학인당은 공사비 4천석. 8천가마, 연인원 4280명 동원 ,건축당시엔 99칸. 대지 2천평, 현재는 520평 7채만 남아 있고
학인당 본채는 궁궐건축양식입니다.
학인당을 들어가보니 이렇게 관리하는 사람들이 묶는곳이 먼저 보입니다.
학인당 안에 들어가면 널찍한 마당, 마당에 있는 정원, 정원에 있는 연못, 그 앞에 있는 본채, 본채 안의 다락, 본채 뒤의 별채의 툇마루, 대문 옆 사랑채, 본채와 별채 중간에 있는 굴뚝등은 예전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현대로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식과 한옥이 잘조화된 모습의 손님이 거주하는곳입니다.
깔끔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곳으로 학인당의 우리가 거주할 방입니다.
창문을 열고 보니 우측측면의 마당이 고즈넉하니 보기가 좋습니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여유라 그런지 더욱 소중히 느껴지는듯한 느낌...
몸은 도시에 유배할수 있어도 어찌 마음까지 도시에 유배될 수 있을까라는..생각이 듭니다.
지민이가 독립화장실을 먼저 둘러보고 있습니다. 한옥의 특징이라면 공동화장실이나 외부에 위치한 옛날형태의 화장실인데 이제 많은 투자로 인해서 독립화장실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생활에 익숙해있는데 한옥만이 옛날 방식을 고집하면 사람들이 안찾는다는 이집 주인장어른의 마음쓰임이 한옥을 여러사람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는듯 합니다.
지민이도 호기심이 많은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하루만 더 있다가자고..고집하던 지민이..여행을 적게 가는편도 아니지만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나 봅니다.
우리의 한옥은 저렇게 여닫이의 형태를 띄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주말만 되면 이곳이 북적거린다고 하니 참으로 한옥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듯 합니다.
지민이가 보물 10개중 하나에 속하는 퍼즐판을 가지고 와서 직접 맞추어 보고 있습니다. 뒷편으로 주인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이네요.
저기 앉아서 동동주라도 한잔 마시면 기분이 좋아질듯
1930년 백낙중 서거 후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백남혁은 효산 이광열에 사사했다고 합니다. 그래 현판은 효산이.
유명한 서예가입니다.
이곳은 사람이 머물수 있는곳이고 항상 사람들이 머물기에 관광객에게 공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들어올때 문이 닫혀있어서 이곳이 어떤곳인가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던곳입니다. 저 조그마한 문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특히 손님들을 맞이해주면 중앙에 정원은 하늘에 솜털구름 하나 없이 달궈진 태양이 땅을 비추고 있을때는 이 정원이 큰 역할을 할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은 앵두를 따먹을수 있도록 일부러 따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민이가 이날 앵두따는 재미에 푹빠져서 따다가 이사람 저사람을 나누어주고 자신도 열심이 먹습니다. 앵두를 따먹었던 기억이 아련해질때 다시 한번 옛날의 어렸을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는군요.
지민이를 그냥 놔두어도 아무런 걱정이 없을것 같은 이집의 고즈넉함과 손님을 배려하는 마음이 더욱더 편안해집니다.
이곳은 용샘으로 막으려고도 했지만 그냥 놔두는것이 좋을것 같아서 이곳으로 내려가는 돌계단만 만들어 두었는데 오히려 전 이게 더 좋습니다. 수온이 차가워서 여름에는 자연냉장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민이도 용샘을 들어갔다가 걸어올라갑니다. 빤히 쳐다보고는 올라가는 지민이
용샘에서 물을 길어올려서 이곳의 연못에도 물을 대고 있습니다. 여름에 이곳의 물이 증발하면서 시원함을 조금이나마 선사할듯 합니다. 물은 더울때 주변의 열기를 머금고 증발하면서 시원해지게 하고 추울때는 얼면서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내뿜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의 우물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물이나 차나, 집이나 모든것을 사람이 사용할때 더욱더 의미가 있어지고 활성화되는듯 하죠^^
어디를 둘러봐도 도심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마음속의 고요를 느끼게 해줍니다.
지금은 크기가 많이 축소되었다고 하지만 500평이 넘는대지에 있는 건물들 사이에 공간이 여유있어 보입니다.
지민이도 신이 났는지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다니는군요.
바람이 불면 맑은 소리를 들려줍니다. 날씨가 딱 적당할때 도착해서 그런지 땀도 별로 나지 않고 좋습니다.
세월의 오래된 흔적을 나무는 속일수가 없었던지 부끄럽게 오래된 속살을 드러내보이고 있습니다.
이곳이 우리가 기거할 방인데 크기가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한가족이 머물기에 아주 적당한 공간입니다.
다시 한번 이곳저곳을 거닐어 봅니다. 한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무언가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도심에서 벗어난 여유로움을 느끼며...
이곳 학인당은 백범 김구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유명한 이들이 방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한국전쟁때는 공산당도 이곳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역사적인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다음날이 되자 저희를 위해 학당으로 초대를 해주십니다. 이곳은 다도학교로 평일에 행사를 자주 한다고 합니다.
다양한 학당의 용도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는 주인장이십니다. 천정이 높은것이 특징인데 이곳에서 전통공연도 하는터라 공명을 위해 일부러 높게 지었다고 합니다.
이것저것이 다 신기한 지민이입니다.
백범김구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 집의 안쪽에 이렇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흑백이지만 백범의 김구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군요.
한옥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지어졌나를 설명해주시고 계십니다. 지금도 흔하지 않은 바로 4중창으로 지어진 집의 모습
이곳은 모두 가변형으로 지어져셔 공연을 할때나 손님이 많아졌을때 방과 공간을 얼마든지 용도에 따라 변경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지민이도 다도에 앞서서 설명을 잘듣고(?)있습니다.
이곳은 지금식으로 말하면 베란다공간..외부와 사적인 공간을 구분하는 완충작용을 하는 공간입니다.
이곳으로 걸어들어가면 일본식과 개화이후에 지어진 현대식이 어우러진곳인데 이때를 기점으로 한옥의 발전이 멈추었다는 주인장의 말씀을 들으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조선시대에는 돈이 많다고 해서 큰 집을 지어서 살수는 없었습니다. 그것도 99칸이나 되는 집을 지으려면 왕의 어명이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은 아직 왕권을 잃기 전에 어명입니다.
이것은 일본제국에게 왕조를 빼앗기고 와서 광무라는 이름으로 칙명을 내린 문서입니다.
다락으로 안내하는데 워낙 큰집이어서 그런지 다락이 하나의 집이군요. 천장이 조금 낮다는것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큰 공간입니다.
하중을 받치기위해서 아치형의 통나무만 사용했다는 다락을 보니 중세건물을 지을때의 서양인들과 조선인들의 지혜가 별반 다를게 없었다라기 보다 오히려 친환경적으로 지었던 우리 선조들이 더 훌륭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각족 고서적과 옛날의 물건이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백두산에서의 적송을 가져가다가 지었다고 하는데 궁궐 목수도 같이 동원되었다고 하니 고종의 마음씀씀이가 느껴집니다.
다락에서 좁은 창을 통해 보는 세상은 이집의 정원과 얼마나 높게 지어졌는지 느끼게 해주는군요.
이것은 제사를 위한 물품들과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석경을 볼 수 있습니다. 돌로된 거울이라 그런지 무지하게 무겁습니다.
이것은 2006년 10월에 도난당한 학인당 편액이 2008년 학인당 인근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인 백모(55)씨가 발견.
학인당 입구에 걸려 있던 '길금정석재(吉金貞石齋)'란 다섯 글자의 현판으로 추사 김정희가 19세기 중반에 쓴 글입니다.
지민이가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궁금증이 많은 탓인지 이것저것을 다 물어보고 다닙니다.
일본의 건축양식도 살짝 엿보이는 공간 일본은 미닫이형태로 방문을 만들어 놓습니다.
이곳은 해우소..집안에서 해우소를 발견하다니 좀 기분이 묘합니다.
지민이도 신기한지 쳐다봅니다.
남자와 여자가 따로들어가는 공간..화장실만 그럴까요? 남녀가 구분되어야 되는곳이 생각외로 세상에는 많이 있는데 차별또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남녀의 차이가 아니라 약자와 강자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래된 축음기입니다. 축음기는 1877년 미국의 발명가 T. A. 에디슨이 발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현대식 축음기는 레코드를 돌리는 턴테이블, 레코드의 홈을 따라가는 바늘, 바늘의 기계적인 움직임을 전기적 신호로 바꾸게 되는 장치등으로 구성되어 있죠.
아주 옛날의 축음기라서 그런지 레코드판 앞면에 딱 한곳을 들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찻잔과 하훼탈이 눈에 띄이는군요.
환한 표정의 지민이입니다. 지민이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더욱 기분이 좋은 듯 합니다.
이제 티타입이 되었습니다. 이곳 주인장이 직접 재배하신 녹차라고 합니다. 호오..
지민이도 자신의 차를 앞에 두고 나름 다도예절을 배우고 있습니다.
맑디 맑은 녹차의 색과 향을 맡으니 다시 한번 한옥에 와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는군요.
지민이는 아직도 신기합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볼것도 많고 만져보고 싶은것도 많은 호기심이 많은 어린이입니다.
앉아서 비가오는 바깥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더 좋아집니다. 한옥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비가오는 마당의 정원을 보고 있으니 마치 제가 집주인이 된양 더욱더 여유로워집니다.
학인당을 방문하기 전까지 한옥은 머물기에는 불편하고 살짝 관광하고 지나가는곳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모네의 수련연못이 있는 지베르니나 은은한 달빛의 프라하나 뢰더성문이 아름다운 로텐부르크, 오래도니 도시의 성벽을 자랑하는 두브로브니크처럼 유럽의 아름다운 모습처럼 우리 민족의 한옥이 아름다운 모습은 오랜시간 지나보니 알것 같습니다.
한옥에 취하고 음식에 미칠 수 있는 전주에서 좋은 기억의 여행은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인재(忍齋) 백낙중(白樂中)은 뛰어난 효자로서 고종으로부터 승훈랑 영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사후(死後)에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본인의 호 중 '인(忍)'자를 따서 '학인당(學忍堂, 전북민속자료 제8호)'이라 하였다. 솟을대문에는 '백낙중지려(白樂中之閭)'라 쓴 현판을 걸어 놓았다. 7량가구(七樑架構)의 곱은자집으로, 꺾이는 부분의 팔작지붕 처리가 흥미로우며 추녀와 사래 끝 등에는 동판(銅板)으로 싸서 풍우를 막게 하였다. 이 건물은 조선말기에 건립된 상류가옥으로 한옥보존지역의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이다. 당시 일류 도편수(都片手)와 목공 등 연인원 4,280명이 압록강, 오대산 등지의 목재를 사용하여 2년 6개월에 걸쳐 건축하였다 하며 백미(白米) 4,000석이 투입되었다 한다.(이동희)
-출처 : [아하! 그렇군요], 전주시, 2004 http://www.jeonju.go.kr |
'여행을 떠나요(1000) > 한국여행(전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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