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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변화를 보았던 이지함을 보신 보령 화암서원

어린왕자같은 식객 2020. 10. 2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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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청라저수지에 자리 잡은 화암서원은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산 27-1번지에 있는 조선시대 서원입니다. 보령의 대표적 서원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인 토정 이지함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토정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화암서원은 1610년(광해 2)에 충청 관찰사 정엽과 이지함의 문인인 구계우가 주도하여 건립하였으며, 1686년 (숙종 12)에 화암서원으로 사액되었습니다.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공부한 토정 이지함은 성리학(주자학)을 비롯하여 주역(역학), 천문, 지리, 산술, 노장사상(도교), 불경, 의약, 복서 등 다양한 학문에 통달한 박학다식한 천재였으며, 뛰어난 재주를 겸비한 기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암서원이 이곳에 자리하게 된 것에 대해 알리는 비가 세워져 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화암서원을 둘러싸고 있는데 아늑한 느낌이 드는 곳으로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 철폐되었다가 1922년 다시 복설 되었고, 청천저수지 축조로 1959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워졌습니다. 화암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중문(中門),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정문(正門), 호패비(戶牌碑) 등이 남아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먹고사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지함은 백성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격변의 시기에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제시한 토정 이지함은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현실에 적용한 시대를 앞서 간 실학사상의 선구자이며 실천가로 세계 최초의 국부론 주창자로 볼 수 있습니다.

 

 

화암서원의 사우에는 이지함을 주벽으로 좌우에 이산보·이정암·이몽규·구계 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재실은 제향 때 제관들의 숙소 겸 학문 토론장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지함은 주역과 사람이 사는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양의 기운은 가둬놓으면 스스로 성정하게 되는데 진득한 사람은 기운이 쌓여나가고 경솔한 사람은 기운이 소진되는 법입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2월 중정(中丁 : 두 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7 변(籩) 7두(豆)라고 합니다. 주역은 다름 아닌 뜻을 밝히는 학문입니다. 뜻을 안다는 것은 그것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니 바로 미래를 안다는 의미가 됩니다.

 

외삼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봅니다. 

토정 이지함은 토정비결이라는 운세를 점치는 책으로 인해 다소 그 능력이 축소되어 평가받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마치 골방에서 사람들의 점을 치면서 평생을 보냈을 것 같지만 그의 행보는 상당히 넓었고 관료로서도 적지 않은 활동을 하면서 애민정신을 직접 실현했던 사람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서애 류성룡과 함께 조정을 이끌었던 영의정 이산해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산해는 작은 아버지인 이지함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 세종 17~성종 24), 북창 정염(정북창, 1506~1549, 중종 1~명종 4), 토정 이지함(1517~1578, 중종 12~선조 11)을 조선왕조 시대 3대 기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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