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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웅천읍 죽정리의 고인돌과 김첨희 정려각

어린왕자같은 식객 2020. 10. 2.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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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 문화가 완전하게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선사시대의 재력과 힘을 과시하는 것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렸다고 합니다. 무덤을 만들 때 얼마나 큰 돌을 끌어다가 족장의 사후를 지켜주는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던 것입니다. 

 

보령 웅천읍 죽청리처럼 고인돌이 있다는 것은 선사시대에 취락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보령 웅천읍 죽청리에는 수십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곳에 고인돌이 가장 크고 대표적이며 보령지역에서는 드물게 북방식 형태를 볼 수도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고인돌이라는 유적이 남겨져 있는 곳이지만 마을 분들의 모임장소로 활용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인돌은 크게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고인돌은 선사시대에 하늘을 믿는 종교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화를 시작할 때 그 변화를 가장 늦게 받아들이는 것은 기성 인구 즉 고령 인구들이라고 합니다. 이미 한국에서도 종교나 시대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교회에서 젊은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전히 고령인구는 종교를 가지겠지만 교리가 아니라 문화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선사시대의 흔적을 살펴보면 수많은 믿음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수명이 짧았던 과거에는 죽음에 대한 의미를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종교가 생겨났고 유럽 같은 경우 영성이 문화의 시작이었지만 미래에는 신화로 남게 되고 인간은 교리나 초자연적인 힘보다는 자연과 과학을 더 믿게 된다고 합니다. 즉 죽음이 멀어지게 되면 과학이 종교를 밀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 같지만 선사시대의 흔적들입니다. 

덮개돌이 그리 두껍지 않고 굄돌이 높아서 겉모양이 탁자 모양인 북방식 고인돌은 주로 한강 이북에서 많이 발견되는 양식의 고인돌인데 보령까지 내려온 것이 특이합니다.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 죽청리의 실개울에도 폭우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죽청리 고인돌은 충남 보령시 웅천읍 죽청리 363-3에 있는데 고인돌군으로 총 12기가 있는 선사(청동기 이전) 시대의 유적입니다.  

죽청리 고인돌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효자 김첨희 정려각이 있스비다. 1892년에 명정된 정려입니다. 

효자 김첨희의 본관은 경주로 양친을 봉양하는데 남달리 뛰어났으며 고종 때 경복궁 중건시 모금하여 925냥을 바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가상히 여겨 참찬에 증직하고 정려를 내리게 됩니다. 

정려의 중안 상단에는 '효자증동몽교관조봉대부증통정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김첨희지려성상이십구년임진육월일명정'이라고 각서되어 있습니다. 

 

죽청리가 포함되어 있는 웅천읍은 원래 보령군 웅천면이었으나 1995년 보령군과 대천시가 통합되면서 읍으로 승격한 곳입니다. 대창리 일대에는 남포오석을 가공하는 석공장이 있는데 돌로 유명한 웅천에는 편마암 바위가 많은데 고인돌 역시 편마암이 대부분입니다. 죽청리의 고인돌과 효자 김첨희의 흔적을 살펴보고 떠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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