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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의 삶이 있는 박열의사기념관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8. 8. 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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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살았던 박열은 독립운동가라기보다는 아나키스트에 가까웠던 사람이다. 국가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억압과 지배에 반대하며 사회혁명을 통해 개개인의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지만 꼭 무정부를 지향하지는 않는다. 한국사회 역시 여러 곳에서 불공평이 야기되고 있다.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평등하지는 않다. 그리스어 아나르코스는 '통치 권력이 없는 상태'의 아나키의 어원이다. 





문경의 박열의사 기념관은 박열이라는 개인을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다. 한 사람을 기리며 기념관을 만들 정도로 박열이라는 사람은 한국을 대표하는 아나키스트다. 박열 외에도 이회영,. 신채호, 백정기, 김종진 등도 당시의 아나키스트였다. 





더울수록 문경 같은 곳의 매력은 더욱더 커진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였지만 아나키즘은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며 모든 종류의 지배 권력을 부정하므로 마르크스나 레닌의 권위주의적인 공산주의와도 대립한다.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때문에 그가 나에게 저지른 모든 과오를 무조건 받아들인다. 박열의 동료들에게 말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뭐든 우리 두 사람을 비웃어도 좋다. 그렇지만 이것은 두 사람의 일이다. 재판관에게도 말한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한다. 설령 재판관들이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해도 나는 당신을 결코 혼자 죽게 하지는 않겠다.’ -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를 매료시킨 박열의 시는 '개새끼'다. 청년 조선의 교정쇄에서 박열이 지은 시를 보고 그녀는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평온할 때는 잘못된 정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위기가 닥칠 때의 잘못된 정보와 흐름은 큰 문제를 야기시킨다. 한국의 수많은 시위의 이면에는 이런 점을 노린 것도 많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은 간토대지진이 발생한다. 민간인들까지 가세한 폭도들은 집집마다 수색하여 조선인들을 끌어내 닥치는 대로 일본도와 죽창을 휘둘렀는데 그것은 잘못된 유언비어 때문이었다. 




그런 위기는 박열이라는 사람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박열의 폭탄 입수 계획을 탐지한 검사는 간토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의 빌미를 조작하려 했고 공판 초기에 묵비권을 행사하던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와 불령사 멤버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단독으로 폭탄 구입과 테러 계획을 추진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조선인의 학살사건을 정당화하는데 언론을 이용하게 만든다. 





박열은 항상 당당했는데 천황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도 여론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가 요구한 것 중 두 가지는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첫째, 나는 피고 아닌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일본 천황을 대표한 재판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법정에 설 것이다. 재판관이 천황을 대신해 법관 법의를 입고 나온 것이라면 나도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이니 왕관과 왕의를 착용케 해줄 것. 둘째, 재판관이 심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선 민족을 대표한 내가 먼저 법정에 서게 된 취지를 선언하게 해줄 것





박열이 준비를 했다고는 하나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불능범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 의도와 성사 여부에 따라 법은 그 죄의 유무를 달리한다. 1926년 3월 25일 대심의 마키노 재판장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 형법 제73조 대역죄와 및 폭발물 단속 벌칙 제3조를 적용하여 사형을 언도하지만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박열은 해방 이후에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옥에서 자살을 하는 데 성공한 가네코 후미코의 시신은 그해 11월 5일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에 있는 팔령산 기슭에 묻혔고  박열은 나이 44세, 21세에 투옥되었던 그가 무려 22년 2개월 만인 1945년 10월 27일, 박열은 홋카이도 변방의 아키다 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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