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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켰던 장충범의 신도비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8. 8. 2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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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역을 가던지간에 임진왜란때 활약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꼭 찾아보는데요. 마침 음성에도 그런 인물이 있다고 해서 그 흔적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우선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습니다. 이정표가 거의 없던 것도 그렇지만 네비게이션에서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더라구요. 



우선 충신문을 찾아 산길로 한참을 들어갔다가 찾지 못하고 이번에는 신도비를 찾기 위해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신도비와 충신문은 2006년에 지정 향토문화유적이 되었습니다.  


차 한대 지나가지 않는 한적한 도로입니다. 이길은 조그만 마을로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통행은 많지가 않습니다. 장충범충신문 및 신도비는 음성읍 삼생리 산92, 원남면 삼용시 산15에 있습니다. 



드디어 심봤다는 생각이 드네요. 장충범의 신도비는 이제서야 만날 수 있네요. 장충범은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아가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채유종(蔡有終), 조웅(趙熊) 등 여러 사람과 의병을 일으켜 5백여 명을 모아 6년간 싸우면서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였다고 하네요. 


승승장구를 하던 장충범은 1597년(선조 30) 음성의 생골 전투에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절(殉節)하였는데, 시신을 찾지 못하여 의관으로 허묘(虛墓)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신도비는 모두 거북위에 세워집니다. 사망하고 나서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녹권(錄券)되고, 1857년(철종 8) 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됩니다. 

철종은 “창의(倡義)하여 순절한 충(忠)은 일월(日月)을 관통하도다”라고 하였으며, 정려를 내려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에 충신문을 세우게 됩니다. 


1860년(철종 11)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에 가증되었고, 1870년(고종 7)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에 정려문(旌閭門)이 건립됩니다. 


이런 신도비는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앞이나 근처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말합니다. 


음성군의 조용한 마을을 내려다 봅니다. 신도란 원래 묘 앞에서 입구까지 낸 길을 말합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신도비를 세우는 것이 성행했는데, 태조의 능인 건원릉(建元陵), 세종의 능인 영릉 등 왕릉 앞에 세워진 것이 대표적입니다. 


옆에 있는 산길을 천천히 걸어봅니다. 길이 나 있기는 한데 조금 질척거립니다. 


봄은 봄이네요. 화사한 꽃들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띄입니다. 사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선한 마음은 사람이 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하늘이 준 벼슬인데요. 음보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조선시대에 벼슬을 하면 공. 경. 대부 같은 벼슬을 받게 되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장충범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됩니다. 





이 비에 쓰인 글은 광산 김재현(金在顯)이 정려기를 찬술(撰述)하고, 김학수(金鶴洙)가 신도비명, 김구수(金龜洙)가 묘지명, 최병심(崔秉心)이 유허비문, 이은상이 기념비문 등을 각각 찬술하였습니다. 신도비는 보통  귀부와 이수를 갖춘 형식이나 귀부는 생략하고 이수만 갖추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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