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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의 박문수 테마길 걸어보기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8. 7. 1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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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많은 테마길이 조성되어 있는데요. 천안에는 박문수묘가 있는 곳에 박문수테마길이라고 만들어진 길이 있습니다. 길은 걸으면 그만이긴 하지만 무언가 테마를 가지게 되면 의미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박문수묘와 고령박씨종중재실로 가는길이 박문수 테마길로 은석사로 올라가는 길목도 박문수 테마길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조금더 안쪽으로 들어오니 훤하게 트인 공간에 논이 조성되어 있고 조금더 안쪽으로 들어가 봅니다. 박문수가 살았을 때의 배경을 보면 사도세자를 지지했으며 정조를 지지했던 당파는 바로 소론으로 노론과 달리 백성의 입장에 가까이 서있었죠. 소론의 시작은 논산의 윤증에서 비롯되었지만 박문수가 살았을때는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에게 배우게 됩니다. 1723년 경동 3년에 증광문과에 합격하며 벼슬길을 시작한 박문수는 백성의 고충을 들어주는 그런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고령박씨 종중재실입니다. 어사 박문수가 바로 고령박씨죠. 박문수에게서 암행어사를 떼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원래 박문수는 정식으로 암행어사의 임무를 수행한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박문수의 소문이 확대되고 전설처럼 자리잡은데에는 어사의 신분으로 영남에 갔을때 환곡을 백성들에게 풀어주면서 부터죠. 



박문수가 잠들어 있는 은석산은 해발 455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금북정맥의 작성지맥으로 천안의 북면, 은지리, 용암리, 병천면 가전리, 병천리를 품고 있는 산이라고 합니다. 


어사 박문수에 대한 이야기도 한번 읽어 봅니다. 


이곳은 박문수재실로 박문수어사의 영정과 많은 유물이 있었는데요. 현재는 천안박물관에 기증되어 있다고 하네요. 


박문수는 벼슬길에 올라선지 1년만인 영조 1년에 노론이 집권하면서 삭탈관직을 당합니다. 이후 1727년 당쟁을 조정하기 위한 영조의 조치로 인해 어사로 영남에 파견이 된 것이죠. 이때 이름을 얻게 되지만 암행하는 것이 아닌 그냥 어사의 신분이였다고 하네요. 이후 다음해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종사관으로 전공을 세워 관찰사에 올라가게 되고 1730년대에는 도승지에 까지 올라가는등 탄탄대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곳은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아무때나 들어가지는 못하는 공간입니다. 


박문수는 당시 시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았던 인물이였던 것 같습니다. 소론이지만 당론이 문제가 있으면 비판할줄 알았으며 고른 인재의 등용을 주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평등한 교육기관이였던 향교를 후퇴시킨 서원의 문제점을 지적해 안동서원을 철폐시켰지만 그로 인해 탄핵받아 풍덕부사로 좌천되기도 하죠.


안의 공간은 여유있고 포근해 보입니다. 백성을 사랑했던 박문수 같은 인물이 현대에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예전에 사용했던 우물처럼 보이네요. 공평한 처벌과 행동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던 박문수는 노론의 핵심인물인 조태채를 콩나물 대가리를 잘라버려야 한다는 말로 비꼬기까지  하면서 싫어했지만 조태채의 아들 조관빈이 극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하자 공평한 처결을 요청하는 말을 영조에게 전했던 사람입니다. 


안쪽으로 조금더 걸어서 올라가 봅니다. 



박문수테마길을 걸으면서 그의 사상을 조금더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네요. 호조판서로 재직시에 국가 재정에 대한 정비를 주도하면서 균역법 제정에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균역법은 양역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이었습니다. 암행어사로 계속 일했다면 일부 탐욕스런 지방관을 색출할 수 있었겠지만 다양한 요직에 있으면서 더많이 백성의 짐이 덜어주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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