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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노씨 삼형제 그들은 누구인가?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8. 3.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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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조선에 큰 영향을 미친 대규모 전쟁으로 전쟁 전에 170만 결에 이르던 조선의 경지 면적은 전쟁 후에는 54만결로 줄어들었고 군량미 조달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림 속을 해매야 했습니다. 기나긴 전쟁에서 조총이라는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왜군에 맞선 사람들이 전국에서 일어났는데요. 그중에 공주 유구면 지역에 모셔진 만경노씨 삼형제도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만경노씨 삼형제는 조헌을 따라가  혈전에 혈전을 거듭한 끝에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에서의 전투를 치루기 위해 내려왔다가 왜군과의 전투에서 모두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떼가 덜 심어지고 헐벗은 것 같지만 지금 정비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주차장 같은 것도 조성될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같은 상황을 겪고 나서도 일어서지 않고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그야 말로 책임 있는 선비라고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나라의 질서는 무너지고 수많은 문화유산이  그때 불타 사라지게 됩니다. 



만경 노씨. 삼형제는 모두 중봉 조헌의 문인으로 노응환 (1555~1592), 노응탁 (1560~1592), 노응호 (1574~1592)로 맏형을 따라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노응탁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청주성과 금산전투에서 참전을 했다가 젊은 나이에 순절하고 노응호는 청주성 전투에 참전했다가 다시 돌아와 군량을 가지고 금산에 갔으나 두 형은 이미 전사한후 노응호도 같은해에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서 보듯이 우리가 겪은 환란을 교훈삼아 후일 닥쳐올지도 모를 우환을 경계토록 하기 위해 쓴 글인데요. 우리는 과연 그런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충의문이 세워져 있는 만경 노씨 유적지는 노씨 삼의사가 순절한 지 400여 년만인 1978년에 공주의 유지들이 모여 '삼의사 사우건립 추진회'를 결성하여 생가지에 사당을 짓고 삼의사로 명명한 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공주시 우성면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거주하는 만경 노씨는 노극청을 시조 및 입향조로 하는 세거성씨입니다. 그의 아들 노판(盧坂)이 신라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진충왕 때 요동양척(遼東攘斥)의 공으로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으므로 평양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만경노씨가 상대했던 왜군들은 전투에도 익숙했고 무기 또한 좋았습니다. 새로운 무기인 조총까지 보유하고 있어서 멀리까지 갈 뿐만이 아니라 정확도에서도 화살을 능가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활은 겨우 백보를 가는데 조총은 수백보를 갔으니 금산에서의 전멸은 어떻게 보면 예견된 것이었죠. 




만경 노씨 삼형제 같은 사람들은 지휘관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데요. 병법에는 정해진 형식이 없고 전투에는 특별한 법칙은 없으며 때에 따라서 그에 적절한 법을 시행하며 나아갔어야 하는데 그 시절에는 훌륭한 지휘관이 많지 않았던 것도 비극 중 하나였습니다. 




제대로 훈련을 받던가 전략을 배우지 못했지만 의연히 일어섰던 이런 분들이 있어서 임진왜란이 그나마 종식될 수 있었겠죠.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의 전통적 진관체제가 무너지자 1593년에 조선시대 5군영의 하나인 훈련도감이 설치가 됩니다. 포수, 살수, 사수, 삼수군으로 조직되었고 약 천여명의 인원으로 배치된 훈련도감은 1881년 신식군대인 별기군이 조직되고 폐지가 됩니다. 






마을 사람들도 자랑스러워하는 공주 만경 노씨 삼형제의 흔적은 충남 공주시 우성면 심산길 36-26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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