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꺽일지언정 굽히지 않았던 의병장 신태식 생가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8. 5. 1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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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운강 이강년 선생, 도암 신태식 선생, 박열 의사 등 수많은 의병·독립운동가가 있었던 문경은 최근 박열이라는 영화를 통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의병대장이었던 신태식 생가는 경북 문경시 가은읍 섬안길 7-2에 있습니다. 


1894년(고종 31) 의병을 일으켜 밀정 혐의가 있었던 문경 가은면(加恩面)의 김골패(金骨牌)와 상주의 강용이(姜龍伊) 등을 농암장터에서 총살한 것으로도 유명한 신태식이 살았던 생가입니다. 




항상 태극기가 걸려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1905년에 강제로 일본의 만행이 저질러지자 1907년 8월 3일 이강년 부대와 합세하여 갈평전투를 치르고, 8일에 단양에서 김세영(金世榮)·강창근(姜昌根)·유제칠(柳齊七)·엄해윤(嚴海潤)·조수안(趙守安)·김운선(金雲先) 등과 함께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울진·평해·영양·영월·산동·제천·원주·홍천·철원·신계·곡산 등지에서 많은 전투를 치루기도 했습니다. 



편의시설 같은 것이 잘 조성되어 있어서 생가를 둘러보는 것이 편하네요. 


지금은 익숙한 지휘관을 칭하는 이름이지만 의병장은 사실 나라에서 운영하는 정식 군대가 아니라 변란이 일어났을 때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만들어지는 일종의 민병대로 지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의병장들이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조선시대의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 및 한말의 항일 의병이 활약했을 때였습니다. 


마루에 걸터 앉아서 쉬면서 마당을 바라봅니다. 덥긴 덥네요. 땀이 그냥 비가 오듯이 흘러내리는 것 같습니다. 


나라를 지키는데 신분과 남녀를 가리지 않았지만 의병은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그들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은 전직 관료와 사림 그리고 승려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유교의 충의정신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죠. 



의병과 이땅을 지켰던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1907년에 가장 강한 저항이 있었는데요. 


당시 그 피해 내용을 보면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의병이 사망 16,700여명, 부상 36,770여명이고 일본군 사망 130여명, 부상 270여명 그리고 한국인 사망 1,250여명, 일본인 120여명으로 68,800여戶의 가옥의 소실이 있었다고 하네요. 



의병장 신태식은 1924년 6월 5일 출옥한 뒤에도 계속 항일 투쟁을 전개했지만 살아생전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2년 1월 15일 향년 69세로 별세했습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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