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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의 인재를 길러내던 공간, 하동향교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7. 6. 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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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향교는 하동을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전적을 보유 하고 있는 곳입니다. 

남자는 한양으로 보내는 말이 있었지만 지금 수준정도까지 서울 집중이 되지 않았던 옛날에는 지방의 향교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었습니다. 하동향교에서 나온 자료중 『하동향안세계원류(河東鄕案世系源流)』, 『하동유안병청금안합편(河東儒案幷靑衿案合編)』, 『속수하동향안(續修河東鄕案)』 은 지역 향토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향교의 건물들은 대부분 옛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면의 건물 풍화루는 한국전쟁 당시에 소실되었떤 것을 1966년 전교 남상수의 주간으로 현대식 건물로 재건하였다고합니다. 


지금은 많이 자제하고 있어서 고등학교마다 플랭카드 거는 일이 줄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지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보면 누가 무슨 시험에 합격했다는 플랭카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던가 장원급제하면 붓글씨로 향교 어디다가 써놓았을까요. 

이곳은 공진필이 중국에 가서 성묘의 제기와 제복의 제작을 모방하여 돌아오면서 지금같은 향교의 형태를 갖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동향교를 보면 살짝 진주향교와 비슷한 느낌이 묻어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규모는 진주향교가 더 크긴 하지만 지형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본다면 비슷한 느낌이거든요. 


소설 토지때문인지 몰라도 하동하면 최참판만 생각이 나는데요.

하동의 인물중 누가 있었을까요. 


바르게 이치를 살피는 명륜당의 의미처럼 공부에 정진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 

하동의 외곽에서 있는 흔적의 인물처럼 강님첨이나 정세유, 정숙첨, 정안, 정지상등은 고려 시대의 하동 출신의 인물로 독서를 하고 글을 저술하는 학자적인 면모를 지녔던 사람입니다. 


유생들이 묵었던 숙소의 동재입니다. 불편했지만 불편했던 생활을 모두 감내하면서 공부를 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하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면 17세기의 겸재 하홍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겸재 하홍도는 남명 이후에 일컬어질 만한 오직 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인조반정 이후로 남명학파가 타격을 입으면서 하동 지역의 유학자들도 침체되기도 했었습니다. 




모든 향교는 이렇듯이 내삼문과 외삼문에 태극문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동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유학자들늠 19세기에 남명학파의 부흥으로 인해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됩니다. 향교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모든  것에 흥망성쇠가 있듯이 지금 향교는 옛날 교육기관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주목받는 날이 올지 모릅니다. 


곱게 칠해진 단청 색깔처럼 다른 교육시스템과 차별화를 가져가기 위한 발걸음이 언젠가는 시작될지도 모르니까요. 


남명학의 핵심 지역이었던 하동에는 남명학파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학자들이 대거 배출된 곳입니다. 진주목에 속했던 하동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접경한 지역으로 섬진강의 물길을 따라 다양한 지식을 접했던 곳이기도 하죠. 


섬진강의 물길이 다양한 학문적인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중에 하나입니다. 

진주목에 속했지만 전라도와 접경한 지리적 특성을 가졌기에 남명학의 핵심 지역의 학문적 연원과 함께 기정진의 학문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하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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