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8대 국왕인 현종의 왕비도 명성왕후이지만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이 기억하는 명성왕후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다. 경기도 여주에 가면 명성황후가 살던 집과 공간이 있다. 기와집으로 잘 정비된 여주의 명성황후 생가는 명성황후의 삶과 어릴때의 모습을 연상케 할 수 있어서 들러볼만하다.
명성황후에 대한 이미지에 일본이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을미사변때 명성황후를 시해한 낭인 무리들은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작업을 했다. 1985년 새벽 미우라 고로의 지휘아래 시해에 참여했던 인물중에 낭인 기쿠치 겐조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명을 받아 명성황후에 대한 저술을 했다.
기쿠치가 펴낸 책은 '조선잡기'와 '근대조선이면사'로 조선이 지배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기술되어 있다. 고종, 명성황후, 대원군을 비롯한 조선 집권층의 무능력함이나 부패상을 상세히 기술하였는데 실상 적지 않은 내용이 왜곡되어 있었다. 명성황후 생가를 들어가면 바로 옆에 한국어를 비롯한 영어를 포함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디지털 안내판이 있다.
오른쪽에 열려 있는 대청마루를 통해 명성황후의 초상이 살짝 엿보인다. 필자가 방문한 날에는 유독 여성분들이 많이 명성황후를 생가를 찾아서 그런지 한나라의 국모이면서 여성으로의 삶을 보고 싶은 한국여성들의 욕구가 느껴졌다.
명성황후가 되기전 전형적인 양반가에서 태어나 살았던 그녀는 어릴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작년은 광복 70주년과 명성황후 시해 120주기를 함께 맞이하는 해였다. 사람들은 명성황후를 드라마나 영화, 뮤지컬로 가장 많이 접해서 그런지 비극적인 느낌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릴때 그녀의 생애는 많이 주목 받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명성황후는 생가에서 8살까지만 살았다. 조선중기 이후 양반가의 살림이 어떠하였는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면서 일찍 아버지를 여읜 소녀 민정호(자영)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유추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보통은 대원군이 집안의 기가 쇠한 양반가의 여식을 선택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실제 명성황후의 가문은 명문가였다.
관리가 잘되어 있어서 그런지 다른 한옥이나 고택에 비해 깔끔하면서도 관리상태가 양호하다. 여흥 민씨는 고려 충선왕은 고려 왕실의 족내혼을 금지하면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15가문을 공표하였는데 이중에 여흥 민씨 가문도 속해이었다. 조선뿐만이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명문으로 당당히 그 이름을 올렸던 가문이다.
양반가는 그 일을 대신해줄 노비가 필요할 수 밖에 없었다. 자고로 양반이라함은 손에 물을 묻힌다던가 힘든일을 하는 계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민치록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딸이 훗날 명성황후에 오르게 된다.
자식을 가지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인 53세에 본 늦둥이 자영은 집안의 이쁨을 독차지하면서 자라난다. 어릴때부터 남다른 영리함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일찍부터 아버지의 철학과 교육관을 받으면서 컸다. 그러나 그녀가 어릴때 아버지가 세상을 뜬다. 다행히도 양오빠를 통해 역사나 경전 등을 섭렵하면서 왕실에 들어가기에 부족할 것이 없을 정도의 소양을 쌓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명성황후 생가에는 조선시대의 삶이 어떠했을지 알 수 있는 살림 가재도구들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중에 실제 사용했던 물건도 있고 다른 곳에서 공수해서 가져다 놓은 것들도 같이 섞여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왕실의 처가가 살던 집인데 불구하고 조금 초라해보였다. 원래 이곳의 생가는 숙종의 비였던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지어졌던 곳이다. 묘막은 빈소 옆에 지어놓고 돌아가신 분을 모시며 지내는 장소로 보통은 조그마한 초가살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왕비의 부원군이었던 만큼 민유중의 묘막은 크게 지어졌다.
3년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지어진 묘막은 남겨진 가족들의 생활장소이기도 하고 거주공간이기도 하다. 명성황후가 거주할 때의 건물은 안채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는데 여주군이 매입하면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기존의 안채를 수리하고 사랑채, 행랑채, 별당까지 중건해놓은 상태이다.
안채에는 명성황후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ㄱ자형 문간채와 ㄱ자형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어서 ㅁ자형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명성황후 생가의 사랑방은 쪽마루를 두른 두 칸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공간이 독립적으로 되어 있어서 공부할 때 있어서 적합한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고택이 잘 조성되고 관리되고 있는 곳은 전국에 많지는 않은편이다. 충남에서는 명재고택, 추사 김정희 고택, 이삼장군 고택등이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여주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역사흔적은 세종대왕이 잠들어 있는 영릉이나 명성황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곳이다.
지붕이 초가로 되어 있지만 거주하기에는 아담하고 깔끔한 느낌을 주고 있는 건물이다. 명성황후의 삶을 이야기할때 남편이었던 고종보다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더 많이 거론된다. 명문가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든든하게 뒷받침해줄 처가가 없는 그녀를 선택했던 것은 흥선대원군의 야망때문이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왕후에 오른 그녀는 주도적인 삶을 살기를 원했고 이는 흥선대원군과 대립각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내려오게 한 그녀는 흥선대원군과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만큼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녀가 밀어주었던 세력은 갑신정변에서 실패하게 되고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청세력에 의해 다시 권력을 잡게 된다. 청나라등에 의지하는 명성황후가 눈에 가시였던 일본은 결국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되고 이곳에서 태어나서 왕후의 자리까지 올랐던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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