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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석학 보령의 한 섬을 찾다.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6. 2. 1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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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말기인 857년에 태어난 최치원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라 골품제의 한계로 인해 자신의 재능을 펼쳐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경주 최씨의 시조이기도 한 최치원은 전국에 수많은 곳을 다니면서 자신의 흔적을 아로새겨놓았다. 보령에도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동시대를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통일신라의 말기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파생되고 있는 상태였다. 최치원이 태어나기 35년전에는 신라의 왕족이었던 김헌창이 난을 일으켰다가 웅진성에서 생을 마감했고 최치원과 동시대의 인물로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있었다. 난세라고 부를만한 시기에 태어나 12살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그곳에서 885년 귀국할때까지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면서 그 글재주를 보여주었다. 




예전에 경상남도를 갔을때 최치원의 흔적을 만나본 기억이 나는데 그 흔적이 이곳 보령에도 있다는 것은 얼마전에야 알게 된 것이다. 진골 귀족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와 기득권의 한계는 신라를 안으로 부터 붕괴시키고 있었다. 신라의 문란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올리면서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으나 이는 진골귀족들에 의해 무산되었다. 



최고운 유적은 이제 200여미터를 남기고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최치원이 한반도를 유람하게 된 것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은거를 결심하면서 부터이다. 자신의 이상과 현실에서의 괴리는 결국 최치원을 은퇴의 길로 몰게 되었다. 



최고운의 흔적이 있는 이곳 보리섬은 충남보령시 남포면 월정리 813-8에 위치해 있다. 남포제방이 놓이기전까지는 이곳은 말그대로 섬이었다가 제방이 놓이고 나서 육지로 변했다. 섬이었을때 이곳을 한 번 와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지만 이미 세월이 지난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신라 말의 혼란기에 세상을 비관하고 전국을 유랑할 때 이곳 보리섬과 성주사를 왕래하여 경치를 즐기면서 시뭇을 짓고 수학하면서 이곳 바위에 글씨를 새겼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은 멸망의 길에 들어선 신라에 백약이 무효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궁예나 왕건, 견훤등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고 전국을 유람하면서 자신의 글을 남겼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려 왕건에게 보낸 서한 중에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결국 고려가 새로운 왕조로 자리잡을 것을 예측했다고는 하나 사실이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고 한다. 



시대의 지성인이었으나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않았던 최치원은 은둔적인 생활을 영위했다. 최치원은 유학자였지만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모든 사상에 대해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흡수했다. 종교가 다르건 사상이 다르건간에 모든 것에 근본은 같다라는 생각을 했던 사람으로 보여진다. 



자그마한 언덕이지만 이곳에서 움막이나 자그마한 집을 짓고 잠시 거주했을지 모르는 최고운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 같다. 천천히 걸어서 올라가본다.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심층풍화로 인해 수직절리가 생겨난 것을 볼 수 있다. 예리하게 절리면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달걀껍질처럼 벗겨지는 박리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보령 바닷길이라는 둘레길같은 것을 개발하여 최치원의 흔적을 되살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치원 선생의 추야우중이라는 시다.


"가을 바람에 애써 시 읊지만 

세상에 알아주는 이 없네

창 밖에는 밤깊도록 비오는 소리

등불 아래 마음은 만리를 달리네." 



정면에 보이는 바위를 병풍바위라고 부르는데 바위 8개가 마치 벙풍처럼 놓여져 있어서 병풍바위라고 부르는 곳이다. 


토황격소문으로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쳤던 고운 최치원 선생은 고국인 신라로 돌아와 자신의 재능을 펼쳐보려고 했으나 진골세력에 막혀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적당하게 살수도 있었을테지만 과감히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한반도의 아름다운 곳을 따라 은둔하면서 살았다. 죽어서 신선이 되었다는 최고운은 시대의 지성인이자 시대를 잘못 만난 문장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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