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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구석구석 초봉리 고인돌과 이유태유허지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6. 2. 1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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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동쪽에 위치한 이유태 유허지(충남 공주시 중등골길 54-7 외 9필지)와 공주의 남쪽에 위치한 초봉리 고인돌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유적지는 아닙니다. 저도 초봉리는 처음 들어봤으니까요. 그곳에 고인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우연히 지나치다가 보게 되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습니다. 




유림 의병정난 사적비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공주에는 우금티 고개가 있는데 그 흔적이 여기에도 자리하고 있네요. 유림 의병정난 사적비란 동학이 발발하여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실패한 것에 대한 비극을 담고 있는 곳입니다. 공주 유림들과 주민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동학교도들과 싸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보는 시선마다 시대적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게 되는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딱히 휴식공원이라고 부를만한 공원은 없었지만 섬바위휴식공원이라고 팻말은 서 있네요. 둑으로 걸어볼만한 산책공간은 있었습니다. 이곳 마을 사람들인지는 모르지만 몇 몇 사람들이 걷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고목이 하나 서있고 그 옆에 유림 의병 정란사적비가 있었습니다. 내용의 전문을 보면 유학을 숭상하고 선비정신이 있는 조선에서 동학 농민운동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이를 반대하여 일어섰다. 첫째, 대본이요. 둘째, 대의요. 셋째, 대법이라 한다라고 적혀져 있네요. 




아주 평범해보이는 돌이지만 이 돌은 고인돌입니다. 초봉리 고인돌으로 이곳에 있는 초봉리 고인돌 3개는 바위덩어리와 같은 모습이며 규모와 형태가 매우 불규칙하다고 합니다. 고인돌 위쪽에는 약 10여개의 성혈이 있고 또한 아래쪽에는 받침돌이 괴여져 있었습니다. 




공주에도 적지 않은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곳 초봉리 고인돌뿐만이 아니라, 남산리 선돌, 신흥리 선돌, 구암리 고인돌등도 있습니다. 



초봉리 고인돌에 대한 짦은 안내글을 읽어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지석묘'로도 불립니다. 청동기시대의 하천이 있는 근처에는 대부분 고인돌이 있었습니다. 수렵생활을 하고 물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기 편했기 때문일거에요. 



이것도 고인돌 같기도 하고 그냥 바위같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는지는 모르겠네요. 



만들어진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요. 비석처럼 보이는데 많이 마모가 되어서 무엇이라고 쓰여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심어져서 지금까지 있는 이 팽나무는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습니다. 벌써 430년이 넘었습니다. 



이유태 유허지에는 서원도 자리하고 있었는데요. 이유태는 현종.숙종 대의 문인으로 특히 현종 때 학덕이 높은 유학자로 크게 활약하였다고 합니다. 충청오현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은 이유태를 비롯하여 송준길, 송시열, 윤선거, 유계입니다. 



이유태 선생은 유배 이후에 이곳 중동골에서 거주하면서 용문서재, 사송서재, 중동정사등을 세워 후학을 가르치고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조선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그는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부세 및 인역제를 개혁할 것을 상소문으로 올렸던 사람입니다. 



그 후손들이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그런지 겨울에 굴뚝에서 연기가 나더군요. 김집의 천거로 인조때 공조 이조참의와 승지를 지냈지만 현종대에 와서는 사헌부 대사헌을 비롯하여 22번이나 벼슬을 내렸지만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이유태 선생은  소론에 의해 추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초려집>> 26권이 전하고 있습니다. 시호는 문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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