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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치인들이 본받을 인물 문극겸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11. 3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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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발달하고 시대는 변하지만 사람사는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시대를 막론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통제하는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은 항상 있었다. 정치는 백성을 향하고 그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런 정치를 하는것은 쉽지가 않다. 정치를 하는 사람도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왕조시대의 정치인 중 문극겸이라는 청렴한 인물이 있었는데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성격때문에 좌천이 되기도 했지만 이때문에 무신정변때 화를 피하게 된다. 

 

충남 공주시 유구읍 추동 1길 25-20에 가면 고간원지라는 사적지가 있다.  고간원지는 고려 문신 문극겸을 모신 사단으로 이 일대에는 고간원을 비롯하여 문숙공신도비, 재실, 충숙선조유덕추모비, 사당인 충숙공영당, 그리고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고간원지의 태선문이다.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문극겸은 일찍부터 글을 잘지었지만 여러번 과거에서 낙방하게 된다. 의종때 문과에 급제한후 좌정언으로 있을 때 의종의 총애를 받던 내시 백선연등의 잘못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지방 말직으로 좌천이 된다.

 

고려는 무신의 난이라는 격변을 겪게 되는데 이는 고려 18대 국왕 의종이 초래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향락에 빠져 내시들과 자신에게 듣기좋은 말만 하는 문신들을 옆에 두고 무신을 업신여기던 의종으로 인해 무신들은 결국 의종 24년 정중부, 이고, 이의방이 이끄는 무신들이 무신의 난을 일으켜 문관, 대소신료, 환관 100여명을 모두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무신의 난때 문신이라고 하면 모두 죽이려는 무신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문신 정치인은 딱 두명이다. 문신들의 오만함을 미워했던 서공은 무인들을 예우했었기에 살아남았고 충직함으로 무신들의 존경을 받았던 문극겸이 살아 남았다. 지방 말직으로 쫓겨났던 문극겸은 다시 중앙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신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때 문극겸은 이런 말을 한다.

 

"왕이 만일 내 말을 들었다면 어찌 이런 지경까지 되었겠는가? 잘 드는 칼로 단번에 죽여달라!"

 

무신들은 문극겸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이의방의 천거에 응하여 용호군대장군과 재상의 자리까지 올라간다. 이의방과의 인연은 혼인관계까지 가게 된다. 문극겸의 딸이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과 결혼하게 되는데 이린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6대조이다.

 

 

 

당시 실세이면서 서슬 서퍼런 무신정권 아래에서 의종실록을 편찬할때 문극겸은 수국사가 되어 그곳에 '임금을 죽인 것은 천하의 제일 큰 악'이라고 직필했다가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무신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무신들이 세운 임금 명종에게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지만 잘못된 것을 직언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문극겸은 명종에게 직간한 뒤 스스로 낙향하여 이곳 공주에서 별세하게 된다.

 

국민들을 진정 위하며 올바른 정치를 하는 정치인은 찾기가 쉽지 않다. 권력과 돈을 모두 취할 수 있는 자리에 있을때 자신을 돌아보고 최고권력자에게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수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문극겸을 모신 고간원지를 보면서 이시대의 국민들이 원하는 정치인이 누군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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