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1000)/한국여행(충청)

시대의 풍운아 김옥균의 묘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12. 14. 06:30
728x90
반응형

사카모토 료마와 김옥균은 공통점이 있다. 봉건시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인물이다. 일본에서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사람들을 유신활동가들이라고 불렀다 김옥균 역시 유신으로 변한 일본을 보고 조선을 바꾸려고 갑신정변을 일으켜 세상을 바꾸려고 했지만 외세에 힘을 빌려 바꾸려고 했다가 실패했다.

 

1884년 양력 12월 4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단행하여 수구파를 처단하여 신정부를 수립하려고 했으나 3일천하로 끝나버리고 같이 했던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곳 김옥균의 묘가 있는곳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 13-1호로 지정되었다.

강화도령이 왕으로 옹립된지 2년만인 1851년에 충남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에서 태어난 김옥균은 7살에 당숙 김병기의 양자로 입양되어 한성에서 자랐다.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일본의 신문물을 보고 감탄한 김옥균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호조참판등을 역임하며 개화파의 확산에 힘을 썼다.

 

 

김옥균의 묘가 있는곳에는 이렇게 사당이 건립되어 있다.

일본으로 망명했던 김옥균은 일본에서도 입지가 좁아지자 1894년 3월 청국으로 다시 망명하였다가 자객 홍종우에게 상해 동화양행 객실에서 암살당했으며 김옥균의 시체를 서울 양화진에 실어다가 능지처참하였다. 4개월뒤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김옥균의 죄가 사면, 복권되었다.

 

김옥균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읽어볼 수 있다.

조선사회는 당시 일본을 비롯한 서양 세력의 위협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자각은 있었으나 수구파를 포함하는 기득권들은 그런 현실에 자각이 부족했다. 김옥균을 비롯한 일부 세력은 조선의 약점과 무능력을 개선하기 위한 정치적.사회적 변혁의 제안으로 이어졌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김옥균 선생 유허에 대한 안내판은 세워진지 오래되었는지 많이 낡아 있는 상태였다.

 

김옥균 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쪽 계단을 이용해 돌아 올라가야 한다.

 

 

살짝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 비석이 김옥균선생묘임을 알려주고 있다.

김옥균 선생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 143에 있다.

이 묘는 일본 동경 청산외인 묘지에서 1914년 9월 11일 의발을 이장, 정경부인 유씨와 합장하여 조성하였다.

 

 

한시대의 풍운아이면서 조선의 약점을 극복하려고 했던 김옥균은 이곳에서 잠을 자고 있다.

김옥균은 어느정도 지적.정치적 경험은 획득했을 것이라 보여진다. 조선 역시 서양세력을 힘으로 몰아낼 수 없다는 자각을 했으나 이를 감정적으로 대하여 힘을 키우기보다 쇄국으로 일관하였다. 사카모토 료마는 감정적인 태도를 이성적인 수준으로 바꾸어 현실에 적합한 수준으로 사고방식을 전환해나갔다.

 

 

 

돌산양이 김옥균 묘 앞에서 조용히 자리하며 지켜보고 있다.

 

 

 

 

 

 

미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것에 맞게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김옥균은 비전은 가지고 있었으나 국내외 역량을 동원할 수 있는 인재도 부족했고 인맥도 부족했다. 일본의 속내도 모른채 궁여지책으로 일본의 도움을 바랬으나 결국 정치 주도 세력과의 협력에도 실패하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갑신정변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김옥균이 시류를 앞서서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권력층이 어떻게 판단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복종의 길과 반항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고 후자를 선택했다. 정치적 결정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소수의 집권층에게 한정되어 있는 당시 상황에서 어떤 정책안이 현실로 옮겨지려면 그들에 입맛에 맞아야겠지만 그건 개혁이 아니기 때문에 김옥균은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