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1000)/한국여행(충청)

장희빈의 남자 숙종대왕의 태실이 있는곳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10. 30. 06:30
728x90
반응형

공주시에 있는 봉정 교차로를 지나가면 태봉 교차로가 나온다. 태봉교차로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태봉동 입구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태봉산이 있고 그 정상에 숙종대왕태실비가 위치해 있다. 길이 잘 나있지 않아서 그곳에 가려면 험한 산행을 해야 만나볼 수 있다.

 

 

한적한 국도변에 공주 숙종대왕태실비로 가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300미터라는 것은 그곳부터 태봉산에 올라가야 된다는 이야기이다. 길이 잘 나있지 않아서 중간부터는 길도 없는 곳을 올라가야 된다.

 

공주에 정안밤이 유명하다더니 이곳에 심어져 있는 나무 10그루중 7그루는 모두 밤나무라고 할정도로 밤나무가 정말 많다. 인부들이 이곳에서 밤을 수확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도로가 잘 나있지만 이제 곧 산행을 해야 되는 길이 나온다. 우측에 있는 태봉산으로 올라가면 된다.

 

 

양쪽에 밤나무들이 있고 그나마 길은 나 있지만 1/3지점부터는 길이 끊기기 시작한다. 1661년 숙종이 태어났을때 풍수지리적으로 명산을 찾아 공주에 내려왔다가 바로 이 태봉산에 태를 묻는다. 훗날 왕위에 즉위하면서 왕의 태실로 승격하여 조성이 된다.

 

 

겨우겨우 산정상에 올라오자 공주 숙종대왕 태실비를 만나게 된다. 힘들게 만나니까 더 반갑게 느껴진다. 원래 2기의 태실비가 1661년 (현종 2)과 1663년 (숙종 9)에 건립되었다. 고종 대 숙종의 태는 경기도 양주로 이장되었다. 나머지 두개의 비석은 훼손되어 있던 것을 공주시에 복원하여 세워놓았다고 한다.

 

 

보다시피 비석이 두개가 세워져 있고 현종때 세워진 비는 비대만을 갖추어놓았다.

 

 

 

현종 때 세워진 비의 높이는 159cm이고, 비신의 폭은 54cm, 두께는 15cm이다. 아래에 있는 좌대는 높이 50㎝, 폭 93㎝, 너비 59㎝이다. 이 비이의 앞면에는 '순치십팔년팔월십오일묘시생원자아지씨태실(順治十八年八月十五日卯時生元子阿只氏胎室)’이라 적혀 있고, 뒷면에는 ‘순치십팔년십이월이십오일진시립(順治十八年十二月二十五日辰時立)’이라고 적혀져 있다.

 

간략하게 만들어놓았다고 하나 디테일은 놓치지 않았다.

 

 

예산에 있는 헌종의 태실처럼 태실비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는데, 귀부는 단일 석재로 만들었으며, 배면에는 6각의 귀갑문으로 완전히 채우고, 윗면 중앙에 장방형의 비좌가 자리하고 있다. 저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되어 있고, 뒷면에는 ‘강희이십이년십월십오일건(康熙二十二年十月十五日建)’이라 새겨져 있다.

 

 

1661년에 태어나 1720년에 세상을 떠난 숙종은 비교적 장수한 임금이다. 붕당정치가 절정에 달했을때 왕비와 빈을 통해 힘의 균형을 유지했던 숙종은 자신의 치세보다 장희빈으로 인해 더 유명해진 왕이다. 남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다가 서인이 재등용에 성공하였으나 이후 희빈 장씨의 왕자 세자 책봉 문제로 인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권력을 잡게 된다.

 

선조 재위 당시에 시작된 붕당정치의 곪은 부위가 터진 것은 바로 숙종때였다. 당파간의 견제와 대립이 극심하던때에 힘의 균형을 통해 왕권의 우위를 확보하였던 숙종은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고 상평통보를 주조하는등 국가 재정구조를 개선하였다.

 

태실이 이곳에 있지는 않으나 태실비가 이곳에 자리하여 숙종의 치세를 다시 되돌아보게 해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