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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9단의 학자 이산해의 묘를 찾아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10. 2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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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시대에 정치인이며 학자의 양대산맥을 꼽으라면 류성룡과 이산해이다. 일부 드라마에서 이산해를 궈모술수가 능한 모사꾼처럼 그리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국가의 존망이 심각해지던 그때에는 그 같은 정치인이 필요했었다. 중종때 이지번의 아들로 태어난 이산해는 고려말의 유학자 이색의 후손이다. 임진왜란때 선조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던 그는 선조의 요청으로 다시 영돈녕부사에 복직이 되고 이후 다시 영의정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산해는 검소한 삶을 살았다. 1608년 선조가 사망하고 불과 1년 6개월 후에 이산해 역시 생을 마감했는데 그의 묘는 예산에 있다. 본관은 한산, 자는 여수, 호는 아계이다. 이곳은 이산해의 재실로 망암이라고 쓰여져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다고 알려진 이산해는 신동이라고 불리었으며 서화도 잘해 대자와 산수묵도에 뛰어났다. 이이, 정철과 친구였으나 당파가 생긴뒤로는 멀어졌다.

 

귀석이다. 거북이가 영물이긴 영물인 듯 하다. 아계 이산해의 묘나 주변흔적에서 귀석이 많이 발견이 된다.

아계 이산해의 묘를 들어가는 입구에는 묘 비보책으로 만든 연당 삼신도가 있다. 삼신도는 신선사상에서 나오는 삼신상으로 삼산에 신선이 거처한다는 전설속의 산이다.

 

사당에 올라와서 보니 한 여름에 관리는 좀 안되고 있구나라는 생각은 들었다.

 

아계 이산해 사당

선조 때 문장8가로 일컬었으며 조정에서는 동인에 속하였다가 북인에 속하였다가 대북의 영수가 되었다.

저서로는 아계유고가 있고 글씨는 조정암관조묘비가 용인에 있다.

 

 

줄타기를 잘하면서 그는 영광과 좌절을 수없이 넘나들었던 사람이다. 절친한 친구라도 과감히 유배시켜버리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던 이산해는 탄핵을 받아 본인이 파직을 당하기도 한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아계 이산해의 묘는 심상치 않아 보인다. 비보풍수를 고려했는데 이전에 올라가는 입구에는 삼신도가 있고 묘역은 보토의 흔적이 있다.

 

이산해가 잠들어 있는 묘역까지 올라왔다.

이산해는 일찍이 정치적 역량을 쌓았는데 동인을 형성하여 당파 정치의 선두가 되었다. 이산해는 선조때 대사간이 되어 많은 인물들을 파직시켰고 반대편에 있는 서인들의 비리와 의혹을 파헤쳐 공격했다.

 

공격할때는 날카롭게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때는 유연하게 했던 이산해는 정치가라고 보면 백전 백승의 노장 정치인이었다. 정치적으로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세력을 만들면서 남들과 다른 그런 인생을 살았던 이산해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휙하고 지나가버린 자신의 짦은 인생을 다시금 생각해보고 있을지 모를일이다.

 

 

옛날 조선시대에는 여성쪽의 집안의 재물이 우세한 편이었다. 똑똑한 사위를 들이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었다. 이덕형의 집안이 가난했지만 총기가 있어보이는 얼굴에 과감히 모든 비용을 들여 혼인할 것을 자청하였다. 이덕형은 이후 장인을 도와 임진왜란이라는 난국을 이겨내는데 큰 공적을 세운다.

 

 

 

이산해 묘의 형태는 합장묘이고 분묘의 수량은 단분이다. 봉분 둘레 11m, 높이는 1.8m이며 용미와 사성이 있으며 배계절에는 문인석 1쌍과 망주석 1쌍이 있다. 이산해의 묘는 분묘의 조성시기가 분명하고 조선 중기 사대부의 전형적인 무덤양식을 갖추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아성부원군 이산해가 죽었을때 전교하기를

 

"아성 부원군은 국가의 시귀로 그의 숙덕 중망은 족히 집에 누워서도 여론을 진정시킬만하였다. 내가 지금 그 병이 낫기를 기다려 상가의 장맛비로 삼으려 하였는데, 갑자기 부음을 들으니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모든 치상에 관한 일들을 현임 대신의 예에 따라 해조에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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