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시 이인면 상하만길 17-34에 있는 연평부원군 신도비는 바로 이귀신도비이다. 신도비는 아무에게나 내려지는 비는 아니다.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대상의 무덤 남동쪽에 세운비이다. 조선 중귀의 문시인 이귀 (1557 ~ 1633)는 인조의 남자라고 부를만큼 인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이귀는 가장 큰 정적인 셈이다. 광해군이 불러 벼슬을 주었으나 이미 과거에 광해군이 자신에게 한일 때문에 앙심을 품고 있던 이귀는 광해군이 아닌 인조의 손을 들어주었다.
연평부원군 신도비는 이렇게 하천을 넘어가야 만날 수 있다. 옛날에 이곳에서 생활을 영위하던 마을 사람들에게는 하천은 꼭 있어야 할 중요한 수자원이다.
정몽주의 손녀 사위인 이석형의 5대손으로 태어난 이귀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1등에 연평부원군이 되었다. 그 후로 이귀의 가문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린다. 아들인 이시백은 후일에 영의정에 오르는데 정사공신 2등, 이시방은 판의금부사의 자리에 오른다.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이귀는 광해군의 폭정을 개탄하고 인조를 왕위에 올릴것을 김류, 김셩진, 최명길, 김자점등과 함께 반정을 한다. 선조의 손자였던 능양군 종을 왕으로 추대하여 연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남한산성의 수축, 호패법의 실시, 국방을 충실히 하도록 주도하였다.
그의 공적보다는 신도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와 샘김새등을 묘사하고 있는 안내판이다.
이귀의 5대를 거슬러 올라간 이석형의 묘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정몽주와 나란히 하고 있다. 포은 정몽주의 묘를 이장할때 바람에 날린 영정이 떨어진 곳이 지금 이석형의 묏자리였는데 명당이라는 소리를 듣고 옮기려다가 못옮기고 이석형의 묘를 그자리에 모시게 된 것이다. 옆 언덕에는 포은 정몽주의 묘가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한돌로 이루어진 비몸과 머릿돌을 세웠다. 거북받침돌은 머리를 수평으로 내밀고 있으며,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과 구름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비문은 조익이 글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으며 , 비의 명칭은 여우징이 썼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항복과 이덕형을 어릴때부터 친한 친구라고 알고 있는데 이는 설화처럼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나중에는 정말 절친하게 지낸것은 사실이지만 한음 이덕형과 친한 것은 이귀였다고 한다. 윤우신 문하에서 동문수학을 했던 절친이었지만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이덕형은 엘리트 관료로 인정받으면서 살았다. 반면 이귀는 주목받지 못하고 지방관을 전전하면서 살아갔다고 한다.
동인이었던 이덕형과 서인이었던 이귀의 우정은 오래도록 지켜졌다고 한다. 항상 넉넉하고 관료로서도 좋은 자리에 있었던 이덕형은 이귀를 항상 챙겨주었던것 같다. 그 이귀가 광해군때에 벼슬을 잃고 쫓겨났다가 인조반정 이후로 화려한 부활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연평부원군 신도비가 인생 반전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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