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다(1000)/영화평(일반)

소수의견, 법은 소수를 대변하지 않는다.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6. 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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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해전이 무려 1,000개가 넘는 극장에서 개봉하면서 이슈를 만들고 있는 가운데 소수의견은 말그대로 소수의 개봉관을 확보한 영화이다. 어떤 이들은 소수의견을 특정한 계층을 피해자처럼 만드는 코스프레를 한다고 선입견을 가질 수 있지만 영화가 한 쪽으로만 편향된 것 같지는 않았다. 영화를 감상한 일부 사람들은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까지 관여할 수는 없을 듯 하다.

 

한국사회에서 가진 사람이든 못가진 사람이든간에 문제는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똑같은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지만 각자 가진 잣대가 다르다. 즉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잣대가 늘어나고 이득이 되지 않으면 잣대는 줄어들어 보이지도 않을만큼 편협하게 변해버린다. 영화는 용산참사를 연상케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픽션이다. 실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배경은 북아현동 13구역, 뉴타운 건설을 위한 재개발 철거현장이라는 현실공간이다.

 

주거공간이 살기 편하게 바뀌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은 먼 미래를 바라보고 도시계획을 세우지 않고 빠르게 건설하는것에 최고의 목표를 두고 있다는데에 있다. 전쟁등로 인해 폐허가 된 곳을 빠르게 복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요구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건물이라도 튼튼하게 지으면 좋으련만 3주만에 무너져버린 와우아파트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20~30년만 지나면 재개발이나 뉴타운 건설 요구가 나오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다. 여기에 개개인의 사욕이 스며들어 간다. 소수의 피해가 예상되어도 나만 돈을 벌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저변에 자리하고 있다.

 

용산참사의 경우 일찍이 용산재개발 이슈가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권리금을 주고 들어가 장사를 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참 억울할 수도 있다. 재개발이 되면 어떻게 챙겨주겠지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안보이는 곳에서는 권리금이 인정될지는 몰라도 보이는 곳에서 권리금은 인정되지 않은 한국에서 너무 안일한 생각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해서 용산 참사의 경찰 대응방식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은 어떻게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지 모르지만 고속터미널 지하상가 재계약 이슈도 여전히 불씨를 안고 있다. 초기에 분양할때 분명히 계약서에 기간이 정해져 있었지만 사람마음이 그것이 아니었던지 기간이 끝나가지만 자영업자들이 책임을 지라고 주장 하는 것은 계약의 법적인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 말이 있다. 법이라는 것은 사람을 믿을 수 없으니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여론의 역할 공수경

 

소수의견에서 공수경 기자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한국영화에서 열혈기자는 바로 여자가 그 역할을 맡았던 것 같다. 여성이라서 약하지만 펜을 상징하는 여론이기에 강한 그런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경찰 살해 혐의로 채포된 박재호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는 윤진원 변호사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80~90년대 기자와 지금의 기자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것 같다. 진실을 알리는 것보다 적당하게 시류에 편승해서 살아가는 기자들이 훨씬 많아졌다. 인터넷 언론이 폭팔적으로 증가하고 메이저 언론의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면서 그런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다.

 

 

억울한 피해자 박재효?

 

어떤 아버지라도 눈앞에서 아들이 죽는 것을 본다면 이성을 잃을 수 있다. 충분히 박재효의 입장에서 억울할 수도 있다. 과연 아들의 죽음에 그의 책임은 아무것도 없을까? 철거반대 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아들 박신우가 철거현장으로 들어갈 일도 없었고 아들이 죽음에 이르는 비참한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뉴타운 개발을 하는 것은 거주민들의 과반수 동의가 있다면 추진이 가능해진다. 박재효의 자신은 반대를 했더라도 대다수의 주민 설득에 실패했다면 암묵적 동의를 했다고 봐야 한다. 자신이 살던 그 삶의 현장을 벗어나고 싶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지 않은가. 어찌보면 자신으로 인해 상당수의 주민들은 재산권의 침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강제철거라는 법적인 수단이 존재한다. 성숙된 시민의식 없이 압축성장을 해온 한국사회의 비극이다.

 

 

 

법은 진실도 정의도 없는 색깔이 없는 존재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법은 정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법은 얼굴이 없다. 약자 편에 있지도 않고 강자편에 서있지도 않다. 강자편에 서있는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강자 편에서 많은 돈을 받고 일하는 변호사들이 타당해보이는 법리적인 변호를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법은 누군가의 억울함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양측에서 가지고 나온 객관적인 정보를 가지고 재단하듯이 판단할 뿐이다. 판결은 판사가 내리지만 그들에게 감성적인 그런 것을 바랄 수 없다. 그들에게 판결을 내리는 것은 그냥 일일뿐이다. 개개인의 삶을 깊게 바라보고 싶은 의지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법정에 들어서 본사람은 알겠지만 양측(보통은 약자쪽에)에 냉철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열혈(?)변호사 윤진원

 

시니컬해보이는 캐릭터 윤지원은 국선변호사로 박재호를 변호한다. 대부분의 변호사가 저런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나 국선변호사는 저렴한(?) 수임비용을 받고 일하기 때문에 굳이 열심이 일할 필요가 없다. 일부 사회적인 이슈가 있는 사건에 열심이 달려드는 국선이 있지만 그건 자신의 커리어 때문이지 의뢰인 때문이 아니다. 대부분의 변호사가 판사나 검사에 비해 친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돈을 받기 때문이다. 그들은 돈을 받고 그들의 말이 맞다는 가정하에 그들의 말도 들어주고 때로는 마음도 없으면서 같이 흥분해주기까지 한다.

 

 

그릇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은 편향적이다.

 

법은 감정이 없지만 공평해야 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릇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들어가면 법은 편향적으로 변한다. 법을 이용하는 사람들 손에 의해 변해간다. 일개 변호사와 대형로펌과의 싸움은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다. 대형로펌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훨씬 많으며 인맥은 그 이상의 영향력을 미친다. 법정에서는 자신에게 유리한 자료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다. 혼자서 뛰는 것과 조직이 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싸움이 된다. 검사와 변호사에게 법정은 일터이고 일은 적게할 수록 좋다. 그렇기에 양형거래도 가능해진다. 여기에 소수의견은 국민참여재판을 이슈로 끄집어 냈다. 자본, 인맥, 전관예우와 같은 불평등한 영향력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의식이 성숙된 나라에서 국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개개인의 성향도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법이 가지는 차가운 성격을 보완하고 판사가 독단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에도 브레이크를 걸어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국민참여재판을 할정도로 시민의식이 성숙되었나를 묻는다면 아직은 물음표일 듯 하다.

 

 

국가가 이것을 바랬다. 검사 홍재덕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사이비 종교의 문제점은 바로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혹은 그릇된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이 그것을 바라셨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옳고 그름이 없다. 절대선이고 모든 것을 가능케 만든다. 군사정권에서 활약했던 고문기술자들이나 공안검사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하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국가가 이것을 바랬다' 그 대상은 국민을 위한 국가가 아닌 국가를 장악하는 권력자들이다.

 

모든 것에 극단은 다른 진영에게 빌미를 줄뿐이다. 모든 것에 균형과 중용이 필요하다. 나에게 이득이 되면 삼키고 쓰면 뱉은 태도는 결국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합의점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유발할만한 빌미를 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이로 인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도 비상식적인 일이다. 조금더 균형있는 시각이 필요한 때에 개봉한 영화 소수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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