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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중심 창덕궁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6. 1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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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된 유서 깊은 곳입니다. 낮에는 여름이요..저녁에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 봄이었던 날씨에 유서깊은 창덕궁으로 발길을 했습니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은편이었습니다. 정도전의 한양 도성계획당시에 건축되지 않고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시대의 왕궁입니다.

 

 

진선문안에 신문고를 치기 위해 이곳을 들어가서 신문고를 칠수가 있었겠지만 간이 배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쉽지 않았던 거죠. 영조대 설치되었던 신문고는 그냥 형식상으로 만들어진 곳이었습니다. 감히 저 돈화문을 지나가서 안으로 들어가서 신문고를 치며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현대잖아요. 입장료만 내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곳의 입장요금은 대인 5,000원입니다. 요즘 요우커들이 한국을 많이 온다고 하는데 이곳은 입장료가 비싸서 잘 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제가 북경의 자금성을 가본적이 있어서 창덕궁과 비교해보면 규모로는 자금성이지만 자연과 어우러진 것으로 볼때는 창덕궁을 더쳐줄만 합니다.

 

 

창덕궁을 들어가봅니다. 창덕궁은 경복궁의 가려져서 그렇지 역사적으로 많은 사건이 이곳에서 알어났습니다.

드라마에서 보았던 상당수의 사건들이 이곳에서 일어났기에 더욱더 스토리가 넘치는 궁궐입니다. 광해에 의해 재건되고 270여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곳 창덕궁은 광해에게는 아픔이 있는곳입니다. 자신이 재건했지만 이곳 돈화문 앞에서 능양군(인조)와 그를 다르는 무리들이 이곳앞에 집결하고 그들과 내통하는 무리가 이 돈화문을 열어줍니다. 우리는 그일행은 아니구요. 그냥 표를 확인하고 들어갈뿐입니다. ㅎㅎ

 

이곳 돈화문을 거쳐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인 진선문으로 가기전에는 회화나무가 있습니다.

광해가 이곳을 건립하면서 심었을지도 모르는 회화나무가 이곳에서 그날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수령이 300 ~ 400년정도 되니까요.

 

 

 

능양군을 따르는 무리들이 다급하게 이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을 향해 돌격해 갑니다.

그런 무리들이 아니었다면 진선문을 통과해서 어찌 신문고를 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정조행차때 그 앞에서 백성들은 자신들의 고민을 말하기 위해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왕에게 바른 말을 아뢰라는 의미의 진선문은 지나 들어가면 왼쪽으로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을 만나게 됩니다.

 

 

오래된 고목들이 다행히 여러차례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는데도 자리하고 있어서 좋았던것 같습니다.

창덕궁은 조선의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중 가장 오랜 기간 왕들이 거쳐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조금 걷다보니 인정전에 이르렀습니다.

거대한 자금성의 규모와 비교하면 작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디테일하면서도 그 위세가 전혀 주눅들지 않을정도의 디테일이 살아있고 아름다운 느낌이 드는 곳이 인정전으로 인정문을 통과해야 만날 수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만나는 공간이 바로 이곳 인정전입니다.

광해는 창덕궁을 중건하고 경덕궁과 인경궁을 중건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폐위될때는 그 중건한 궁궐을 꼬투리잡습니다. 만들어야 할 것을 트집잡은 거죠. 과한 세금낭비로 인해 국고가 탕진되었다는 겁니다.

 

 

조선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독대가 엄격히 금지되었고,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배석해 대화를 기록해야 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3품관 이상부터 각 품계마다 상하계를 두어 총 24계였으며 정3품 상계 통정대부(通政大夫)이상을 당상관(堂上官)이라고 했으며 그 아래 통훈대부(通訓大夫)이하 종6품까지 당하관(堂下官)또는 참상(參上)이라고 했습니다. 정7품부터 종9품까지를 참하(參下:參外)라 하여 구분했습니다.

 

 

역사 드라마에서 보면 임금을 만나고 나서 이곳에 나와서 혼잣말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긴합니다.

지금 검사들을 다른 말로 영감이라고도 하는데 영감은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이나 종2품의 벼슬에 대한 호칭이었고 그 위의 판서나 당상관을 대감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무한테나 영감이라고 부를수 없었던 거죠. 마누라 역시 그렇습니다. 원래 마노라라는 단어는 왕후에게 붙이는 가장 높이는 칭호였습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그 의미가 쇠락된 것이죠.

 

 

저 자리를 보니 영화 광해에서 이병헌이 하는 말이 귓가를 맴도는 것 같습니다.

내나라 내백성이 소중하다는 그말..기억해야 되겠습니다.

 

 

1803년 순조때 소실되기전에 오랫동안 임금이 신하와 만나는 공간이 바로 이곳 인정전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볼수는 없었지만 광해는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며 밤까지 술을 마시고 있을때 이곳에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왕이 이곳에 나와 신하들을 내려다보며 많은 이야기를 했을텐데요.

 

 

 

이제 인정전을 보았으니 나와서 선정전으로 나아갑니다.

임금이 집무를 보았다는 집무실의 역할을 했던 선정전은 인정전 동쪽에 있으며 국정보고나, 조정회의 , 경연등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며 인조반정 때 소실되기도 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경로잔치를 열기도 했다는데 성종 때 공예왕후 한씨가 노인을 공경하는 풍습을 권장하기 위해 양로연을 베풀었습니다. 이때 80세 이상의 노인 전원을 대상으로 했다니 당시 평균수명을 생각하면 정말 오래살았던 사람들이죠.

 

 

아까보았던 인정전의 왕의 자리와 이곳 선정전의 왕의 자리는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아까 그곳은 공식적인 행사를 치뤘던 곳같고 이곳은 마치 왕의 연구실같은 느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현실의 문제와 미래를 걱정했었을 겁니다.

 

 

갑자기 주마등처럼 과거의 일들이 스쳐지나갑니다.

창덕궁은 또 하나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데 바로 단종 복위 운동이죠. 성상문은 아버지 성승, 박중림, 박팽년, 유응부, 권자신, 금성대군, 이개, 유성원, 윤영손, 김질등과 함게 세조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이를 기회로 창덕궁에서 세조의 운검(큰 칼을 들고 왕을 시위하는 것)을 빌미로 거사하려다가 실패하죠. 사육신의 후손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분은 이개의 종증손인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과 종고손인 북인당수 이산해입니다.

 

 

선정전을 지나 조금 더가면 희정당이 나옵니다.

희정당은 그 어떠한 창덕궁의 건물보다 왕이 많이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편전이었던 선정전이 비좁다 하여 침전이었던 이곳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던거죠. 이곳 희정당은 효명세자가 많이 머물렀던 곳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역사상 세자로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제외하고 기억에 남는 세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조선 후기에 할아버지 정조를 닮았다고 알려진 세자인 효명세자는 2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가 이곳에서 독서를 즐겼다고 하네요.

 

 

 

세자가 머물렀던 동궁의 근처에는 이렇게 건물이 여러채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성정각으로 보춘정이라는 편액도 보입니다. 조선시대에 왕자가 태어나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야 세자로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같은 경우 숙종이 너무나 기뻐서 유례없이 빨리 세자로 만들기도 했죠. 당시 반대했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유명을 달리하게 되죠.

 

성정각을 지나 저 문으로 지나면 낙선재가 나오는데 원래는 그곳에 중화당이 있었는데 1891년 없어졌다고 합니다.

 

특이한 형태입니다. 원래는 단층인데 동쪽으로 직각으로 꺽인 2층의 누가 붙어 있는데 저곳에 올라가서 창을 모두 열면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서 꽤 시원했을것 같습니다.

 

 

집희라는 현판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모두 개방되어서 안쪽을 잘 관찰할 수 있습니다. 세자의 교육은 사감원이라느 곳에서 담당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교육과 독서, 무예등을 배운 것이죠.

 

성정각을 지나 넘어가면 바로 부용정, 명화당이 있는 연못이 나옵니다.

전 창덕궁 후원으로 넘어오면 바로 희빈 장씨가 연상됩니다. 비운의 여인이면서 창덕궁에서 결국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장희빈입니다. 이곳 부용지가 유명해진 것은 바로 대장금이 촬영되면서 부터입니다. 연못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사정기비각, 남쪽에는 부용정, 북쪽에는 주합루, 동쪽에는 영화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조가 사랑했다는 정자 부용정으로 넘어가봅니다.

 

 

연못에 살포시 두개의 기둥이 자리하고 있눈 부용정은 정조가 연상되는 정자로 신하들과 낚시를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특히 체제공과의 교류가 많았을 겁니다. 정면 5칸, 측면 4칸, 뒷칸 3칸의 열십자 모양의 팔작지붕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저 높은곳에 위치한 곳은 창덕궁 후원의 주합루입니다. 주합루로 들어가려면 연못을 지나 물고기와 물의 문이라는 어수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주합루는 정조 때 지은 2층 누각인데 그곳에는 지금 누구나 지나갈 수 있지만 임금만이 다닌다는 수어지교의 어수문이니 함부로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양쪽에 작은 문이 신하들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야 하는 문입니다.

 

백성들과 소통을 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두어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건물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창덕궁은 광해, 인조, 정조, 장희빈, 영조 등 수많은 역사속 인물의 이야기가 있어서 더욱 할말이 더 많은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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