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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의 마산 역사는 현재 진행형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2. 9. 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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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멀지 않은 과거에 민주주의를 안착시키기 위한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이였다. 바로 그곳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 창동으로 발길을 했다. 창동에 가면 창동입구에서 부터 시민극장, 학문장, 창동네거리, 부림시장, 남성동파출소 자리등을 거닐면서 역사의 흔적을 찾는것은 아기자기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지금은 대다수의 도시가 거대화되고 인구가 집중되어서 이정도의 도로폭으로는 유동인구를 수용하는것은 어림도 없었지만 예전에 이도로가 마산의 중심가였다는 사실이 다소 흥미로운 부분도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에는 골포라고 불렸고 1663년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낙동갈 일대 13군의 조공미를 서울로 수송하기 위한 조창이 설치되었던곳이라고 한다. 이후에 마산포라고 불리면서 훗날 마산의 기반이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낙동강 전선의 병참기지의 역할도 했다는 이곳은 1960년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3.15 마산의거가 일어난곳이기도 하다. 역사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 1970년 10월의 부마민주항쟁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는 건물이다. 마산을 대표했던 극장이 있던곳으로 90년대 쇠락해져 가는 마산의 역사와 함께 묻혀지고 잊혀져간곳이다.

 

이곳에 초청된 블로거들이 다양한 마산의 역사를 담고 있는중이다. 이곳의 토박이의 설명을 들으니 생생하게 마산의 과거가 되살아나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게 하고 있다. 과거의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던 목소리가 바로 이곳에서 모인것을 보면 성숙된 민주사회로 가기 위한 초석의 발걸음이 아직도 진행되고있지 않을가라고 생각해본다.

 

 

부마항쟁의 역사

 

불과 몇일만의 시위이지만 이들의 시위가 상징하는 바가 컸다. 몇일전 박근혜 새누리당 대표가 사과발언을 한것처럼 우리의 성장에는 대다수 서민의 희생이 있었고 인혁당 사건은 권력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였으나 5.16 이면에는 권력에 대한 탐욕이 자리하고 있었다. 인권은 없고 오직 국가가 지시한 방향으로만 걸어가야만 하던시기에 긴급조치는 숨 막히는 억압이였다.

 

 

무너지지 않을것 같던 박정희의 유신정권을 비롯하여 반독재는 머언 과거처럼 보여지지만 지금은 오히려 더 치밀해진 권력탐욕이 있는것 같은 느낌이다. 언론이 진실을 외면하고 사람들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 없을수록 이곳 부마항쟁의 여운은 더 짙어지고 있다.

 

마침 전봇대에 붙여져 있는 홍보물은 마산출신스타 영화의 밤행사를 알리고 있다. 최현이나 이대엽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과거의 영화만큼이나 이들역시 짙은 흔적을 남기고 간 사람들이다.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 미래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것은 어느하나 빼놓고 이야기할수 없는 중요한 순간들이였고 다시 올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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