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이에게 난 아버지라는 존재이지만 나에게는 지금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 아빠 등은 여성과의 사이에서 자손을 잉태시킨 남성을 그 자손의 관점에서 볼 때 쓰는 한국어 호칭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의미가 상당히 크다. 아주 오래전 사진을 문득 바라보면서 내가 살아온 일부의 삶이 기억나기 때문에 이 포스팅을 쓰기로 한다. 더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지민이의 식객이라는 블로그에도 지민이가 있게 해준 아버지의 존재를 다시 기록해 본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졸업식날 뇌출혈로 인하여 쓰러지셨다. 내 인생에서 공부로 인한 혹은 인맥의 형성기를 모두 놓쳐버린 시기이기도 했다. 쓰러지시고 집으로 통원치료를 하기까지 병원 응급실에서 지낸 시간은 수개월정도였지만 초등학교를 막 졸업했던 나와 더 어린 동생을 데리고 병간호하는 어머니 없이 생활하기에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30년을 훌쩍넘겼던 나의 어린모습과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현재의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후 반신불수로 몸이 불편해지신 아버지를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에게 맡기고 어머니는 일을 하기 시작하셨다. 그 흔한 학원하나 다니지 못하고 학교에서 파하자 마자 하는일은 아버지를 모시고 한의원과 병원을 가는일이 일과가 되어버리고 식사, 집안 정리, 도시락 또한 동생것까지 챙겨야 되는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시도때도 없이 피가 혈관을 막아서 쓰러지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열손가락과 열발가락을 모두 따주고 약을 드려야 하는일이 잦아지고 성치 않으신 몸에도 불구하고 몸을 이길수 없을정도로 술을 드시는 경우가 정말 많아서 고등학생때는 아버지를 찾아 온 동네를 다닌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여러번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한번은 가게 앞에서 몸을 주체하지 못하셔서 쓰러지면서 가게의 유리에 목부위를 베어서 10cm정도 찢어진 일이 있는데 쏟아지는 피를 보면서 나름 침착하게 대처했지만 영화에서 보던일이 현실에서 발생하는것이 순식간이라는 생각을 했던 날이었다.
결국 제대하고 1년뒤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10년여를 병간호하면서 나의 중요한 시기가 지나가버렸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남들이 인생의 힘든점을 이야기하고 조그마한 일로 가족에게 실망하는것을 보면서 자신이 보는만큼만 세상을 안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졸업이후로 원하지 않았어도 집안의 가장역할을 했고 지금도 집안의 가장이다.
아버지가 몸이 조금 나아질수 있을까라는 기대감에 중학교때 한달에 두마리씩 오리 목을 잘라서 피를 받아냈고 어머니와 좋다는 약을 찾아 수없이 돌아다녀봤다.
나에게 나같은 아버지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있었기에 지민이에게 나름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아쉬워 하기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것이 무엇인가 잠시 생각해보게 된 하루이다.
지금까지 지민이의 식객에서 개인적인 일상사는 거의 언급한적이 없지만 문득 하나쯤 나의 일상사는 포스팅하고 싶어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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