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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에 자리한 조선왕실의 핏줄이었던 익성군의 묘

어린왕자같은 식객 2020. 2. 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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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시대에 권력을 잡는 방법 중 하나는 무고와 모함이었다고 합니다. 절대적인 왕권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던 왕조시대에 무고와 모함은 자신의 입지를 굳혀줄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이죠.  지금도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쉽지 않은데 조선시대에는 오죽했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딸기의 고장이라는 논산에는 중종의 증손자인 익성군의 묘가 남아 있습니다. 






신도비의 비의 덮개돌 앞면에는 반용이 조각되어 있고 옆과 뒷면에는 구름무늬가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도비의 덮개돌 앞면에는 반용이 조각되어 있고 옆과 뒷면에는 구름무늬가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의 받침은 네모진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비 몸을 거북받침 위에 세우는 보통의 신도비와 다른 형태라고 합니다. 






중종의 아홉 번째 아들인 덕흥 대원군의 아들 하원군의 둘째 아들이 익성군입니다. 







익성군은 광해군 때 권세를 누리던 이이첨과 악연으로 엮여 있습니다. 이이첨의 선조인 이극돈 역시 익성군의 증조부인 중종과 악연이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모함하고 무고하는 사람들은 계속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럼으로써 자신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고 그걸 퍼트리는 사람은 그걸로 인해 주목받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연산군의 폭주로 수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바로 이극돈이 실록청이 개설되었을 때 당상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살짝 김종직의 '조의제문'의 내용을 유자광에게 흘린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실제 사실관계가 파악이 될 때까지 나오지 말아야 될 정보를 흘림으로써 누군가는 이득을 보게 됩니다. 아무튼 그 일로 인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공신들은 이극돈을 무오사화의 원흉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그 후손인 이이첨은 오랫동안 음지에서 학문에 몰두하며 기회를 엿보았지만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 때 세조의 어진을 살려내면서 이른바 뜨는 해로 조정에 등장하게 됩니다. 선조에 이어 광해군대에는  이이첨은 정권의 일인자로서 국사를 좌지우지하면서 계속 위기를 만들어냅니다. 



그 과정 속에 이이첨의 무고로 익성군은 광해군 4년(1612)에 거제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의 신도비의 비문은 조익이 글을 지었다고 합니다. 거제도에서 생을 마감한 익성군의 묘는 인조반정 이후로 이곳 논산으로 이장됩니다. 




수많은 사람을 무고하고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권력을 누리던 이이첨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킴으로써 정적들에게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을 제공하게 됩니다.



 무리한 행보를 하던 이이첨으로 인해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며 이이첨은 반정 소식을 듣자마자 가솔을 이끌고 남쪽 성벽을 넘어 이천의 시골집으로 도망쳤다가 관병에게 붙잡혀 64세의 이이첨의 목이 맨 처음 잘렸다고 합니다. 아들 이원엽·이홍엽·이익엽 등이 뒤를 이었다고 합니다. 넷째 아들 이대엽은 옥중에서 죽었습니다.  





익성군 묘앞에는 무인석이 문인석도 남아 있습니다. 무인석은 전체가 하나의 돌로 조각된 것으로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양손을 가운데로 모아 칼집을 쥐고 있는 형태입니다. 현재 익성군 묘역 우측에는 3기의 묘가 남아 있습니다. 좌측에서 부터 진천군 묘(익성군의 둘째), 진릉군 묘(익성군의 셋째), 진평부정 묘(익성군의 넷째)가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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