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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의 흔적이 있는 우금치 전적지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6. 9. 2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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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에서 조금 외곽으로 떨어진 곳에 우금치 터널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은 과거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흔적으로 피의 역사가 아로새긴 지역이기도 하다. 백제시대 이후로 공주 이남의 전라도 지방은 항상 수탈을 당해왔던 지역이기도 하다. 가장 많은 곡식이 생산되는 지역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다른 지역보다 많은 생산량이 그 지역 사람들을 핍박받게 한 이유가 된 것이다. 




이곳은 우금치 공원을 만들기 위한 것인지 정비를 위한 것인지 몰라도 지금 한참 공사중이다. 

동학농민운동이 처음 시작한 것은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통하여 정치운동으로 성장하면서 이다. 처음 시작된 난은 전라도 고부군으로 항상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었던 고질적인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한 여름에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찾는 사람들은 있어도 이런 역사적인 유적지를 찾는 사람들은 많지는 않다. 그래서 주차장의 넓은 공간을 작업을 하시는 분의 차량만 주차가 되어 있었다. 



쪽은 아직 공사가 완료되지 않아서 험로이다. 어느시대 이건 좋은 시대를 만들기 위해 험로가 있었다. 동학농민운동 역시 직접적인 불씨가 된 사건이 있었는데 만석보(萬石洑)의 개수문제에 따르는 수세징수사건으로 부민(富民)을 체포하여 불효·불목·음행·잡기 등의 죄명을 씌워 그들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은 것 뿐만이 아니라  강의 하류에 필요하지도 않은 신보(新洑)를 쌓게 하고 이를 이유로 농민들에게서 고율의 수세를 징수함으로써 700여 섬이나 착복했다. 



우금치 전적지 주변공간은 생각보다 여유가 많다. 천천히 돌아보아도 좋긴 한데 생각보다 모기가 많다. 



조금은 방치되어 있는 듯한 우금치 전적지의 기념탑이다. 양쪽으로 수풀이 안쪽으로 모여 있는 것도 조금 특이하다. 



그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돌탑같은 것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동학 농민운동은 비교적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는데 그들이 결의한 4개의 항은 아래와 같다. 


①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② 군기창과 화약를 점령할 것

③ 군수에게 아유(阿諛:아첨)하여 인민을 침어(侵漁)한 탐리(貪吏)를 격징(擊懲)할 것

④ 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京師)로 직향(直向)할 것



감사문이라고 있는데 이 탑이 만들어질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니 그냥 지나간다. 

전봉준을 필두로한 동학농민군은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황토현싸움에서 승리하고 동학농민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정읍으로 진격하여 이를 점거하기까지 했다. 



패전과 승전을 거듭하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참전으로 인해 상황이 급변했다.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에 의해 11월 27일 목천 세성산의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김복명이 붙잡혀 죽고 사상자 수백 명을 내고 패배하였다. 



묘한 미술작품 같아 보이기도 하고 흙으로 만든 탑 같아 보이기도 한다. 저 안에는 빈 공간이다. 



설명이 없으니 그냥 마음대로 상상해볼뿐이다. 폐타이어를 녹슨 철사로 칭칭 동여맨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고부민란에서 시작한 동학농민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바로 공주의 우금치 고개에서 였다. 동학농민군으로서는 운명을 건 일대혈전이 벌어진 우금치의 공방전은 약 2일간 40∼50회의 격전을 치렀는데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동학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하면서 사실상 운동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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