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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최초의 승병장 영규대사의 묘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6. 6. 3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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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월 6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된 곳이 있습니다. 충청남도 공주시의 구석의 유평리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장이었던 영규대사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영규대사 묘가 자리한 곳에는 마을이 하나 있는데 계룡뜰 자전거마을이라고 지정이 되어 있네요. 자전거를 타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겠죠. 


조금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영규대사의 묘로 가는길을 알리는 홍살물이 있습니다. 낮은 산의 경사면을 깎아 조성한 묘역은 북향으로 조성이 되어 있는데요. 이곳의 비석은 정조의 아들인 순조 10년(1810년)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다고 합니다. 



임진왜란때 파죽지세로 올라오던 왜군에게 첫 승을 거둔 사람은 바로 영규대사로 당시 선조와 대신들은 중인 영규대사에게 어떤 상을 내릴 것이냐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고 합니다. 수도승에게 벼슬을 내리는 일이 없었지만 특별법을 만들다시피해서 영규대사에게 당상관(정3품)에 해당하는 '첨지중추부사'라는 벼슬이 내랬습니다. 



금산전투에서 모두 사망했고 그 사람들을 묻은 것이 칠백의총이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영규대사는 부상을 입었지만 죽지 않은 상태에서 이곳까지 와서 죽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묘비는 세운 것이 아니라 순조때 문중인 갑사의 승려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죠. 



일설에 의하면 영규대사는 청주성 전투를 같이 치뤘던 조헌의병장에게 금산전투의 참전을 만류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헌이 고집을 부려 참전하자 혼자 죽게 할 수 없다며 함께 전투에 나가 같이 전사를 한 것입니다. 



사후에 영규대사는 지중추부사(정2품)에 추증되었으며 이곳 묘는 표충사에서 그와 함께 했던 승병장을 제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금더 위로 올라오니 영규대사묘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살생을 금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는 불교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나가는 것은 불교가 있는 이래 당시까지 있을수 없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왜 영규대사의 묘가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읽어보고 올라갑니다. 



풀들이 자라서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네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주변을 녹색으로 만들고 있네요. 



순조때 세워졌다는 비석은 풍화가 많이 되어서 자세히 보아야 그 글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전국에서 일어났던 의병이나 승병들은 조정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조는 자신의 휘하에 두기 위해 명령체계를 두려고 했으나 자신들은 그것을 바래서 그런것이 아니라며 스스로 그만두고 떠난 의병들도 적지 않았다고 하죠. 



임진왜란 당시에 관료들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의병들을 응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했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잘못된 행정권력 남용과 사병들이 혹시나 반역 도당으로 변할까라는 보신적 무사안일주의때문이었는데 그런 시대적 상황으로보면 금산성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세상을 떠난 영규대사가 오히려 더 의미있어 보이네요. 


영규대사 묘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 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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