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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 선생이 만든 토정비결과 그의 흔적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6. 2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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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운은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매년 초가 되면 내 토정비결이 궁금해질때가 있다. 그걸 만든 사람이 누구일까라는 궁금증을 20대에 생각해본적이 있는데 보령에서 그 흔적을 만나면서 조금더 명확해졌다. 샤머니즘등이 한반도를 지배할때만 하더라도 체계적인 점을 보기보다는 하늘에 맡길때가 많았던것 같다.

 

토정 이지함 (李之菡)(1517(인종 1)~78(선조 11))이 토정비결을 만들면서 부터 민간에 서서히 보급이 되기 시작되었다. 지금은 누구나 보는 토정비결이지만 이지함이 중국에서 유행하던 여러 가지 술서(術書)를 인용해 엮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주술처럼 한해의 점을 쳤을지도 모른다. 이지함은 의약·점·천문·지리·음양·술서 등에 모두 능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초가집도 아닌 흙담 움막짐에서 청빈하게 살면서 토정이라는 호까지 붙게 된 인물이다.

 

 

 

햇살이 상당히 강하다. 이제는 썬크림을 바르지 않으면 십수분안에 금방 타버릴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조선을 개창하고 기본틀을 만든 정도전의 스승이며 고려말의 인물 목은 이색의 6대손 이지함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물욕을 이겨내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을터인데 이지함은 어떻게 그런 유혹을 이겨냈을까? 이지함 선생은 재물을 가볍게 여겨서 남에게 주기를 잘했으며 세상의 화려함이나 음악, 여색에 담담하여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질이 배 타기를 좋아하여 바다에 떠서 위태로운 파도를 만나도 놀라지 않았다고 하니 보통사람이 아니긴 했나 보다.

 

 

토정비결 하면 이상하게 연상되는 것이 풍수지리이다. 둘다 미신같기도 하지만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예언같은 느낌이 든다. 토정비결은 한 사람에 국한되지만 풍수지리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가족 그리고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풍수지리를 알았는지는 몰라도 묘자리가 좋아 보인다.

 

 

이지함을 말할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몇명있는데 그중에서 사육신 이개가 있다. 이지함은 이개의 증종손으로 사육신 대부분이 멸족을 당한것과 달리 이개의 집안은 완전히 멸족당하지는 않아다고 한다. 이개는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 김질(金礩)의 밀고로 체포되어 국문을 받고 의연하게 관련자들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체력이 떨어진 것인지 이곳을 올라갈때도 숨이 헐떡거린다.

옛 선현을 만나는 것이 이렇게 힘들었던 것인가.

 

 

이지함은 벼슬길에 연연해하지 않았는데 아산의 현감으로 있을때 걸인들을 구제해주기도 했으며 수해에서 백성들을 구하기도 했었다.

 

 

이곳 이지함 가족묘 터는 어머니상을 당할 때 처음 정했는데 이곳에 아버지를 비롯하여 가족의 묘터를 정했다. 그리고 그의 형이었던 이지번의 아들은 이산해는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류성룡과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임진왜란때 실각되기도 했지만 이산해는 선조시대를 말할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이지함 가족의 묘에는 문무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후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그걸로 먹고 사는 사람이 적지 않을정도로 영향을 미친 토정 이지함의 토정비결은 말그대로 베스트 셀러라고 볼 수 있다.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웠던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셨던 토정 이지함은 임진왜란때 병조판서였던 백사 이항복을 제자로 두었고 율곡 이이와 남명 조식을 친구로 둔 사람이었다.

 

 

 

얼마나 묘자리가 좋기에 후손들이 좋은 벼슬길에 오른 것일까?

묘를 등지고 바라보니 앞에는 보령의 바다가 보이고 좌우측으로 좌청룡과 우백호가 자리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더 앞에 보면 자그마한 언덕같은 안산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도 세개의 삼태봉중에 중심봉인 안산이 가장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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