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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서 사라진 김옥균 생가 유허지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12. 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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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에 가면 김옥균 생가 유허지가 빈 공터위에 남아 있다. 

 

천안으로 여행을 가다 만난 김옥균 유허지라는 푯말에 그냥 지나칠수가 없어 들려보았다. 이곳은 집의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는 빈 공터였다. 관심없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칠 듯 하다. 원래는 10여 호의 민가가 있었는데 화재로 인해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역사책에서 만난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주역이며 3일천하로 자신의 꿈이 끝나기도 했다.

 

갑신정변의 결과로 김옥균 선생의 처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자신도 청나라 리홍장을 만나러 상해를 방문하던 중 홍종우에게 피살되었다. 갑신정변(1884)은 청의 개임으로 실패하였지만 갑오개혁(1894)으로 개화당 내가기 들어서면서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김옥균은 충남 공주에서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집안에 출생하였다. 은진송씨와 안동김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거칠것이 없는 시절을 보냈을 듯 하다. 어릴때부터 학업에 관심이 많았던 김옥균은 박규수와 박영교등을 만나게 되면서 서양의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된다. 힘이 없던 조선에서 그는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들로 조직을 이루게 된다.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등과 같이 어울리며 고종의 허락하에 일본의 신문물을 접하게 된다. 청나라의 속국으로 살아가는 것이 조선의 미래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는 일본을 활용하여 청나라에 대적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조선 말기에 대원군이라는 호랑이가 사라지자 민씨 일파라가 전면에 등장한다. 김옥균은 세도정치가 심각해지고 청나라와 연결된 민씨 일파의 전횡이 심해지자 개혁을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김옥균은 당시에 일본의 야욕이 얼마나 컸던지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조선을 지배하려는 다른 생각이 있었던 다케조 일본 공사의 도움을 받아 1884년 우정국 청사의 낙성연을 계기로 수구파를 제거하고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천하로 끝을 맺게 된다.

 

 

간단하게나마 김옥균에 대한 역사이야기를 접해볼 수 있다. 갑신정변은 19세기 말기의 군인들의 반란이었던 임오군란이나 동학운동과 달리 소수의 지식인들이 시도한 개혁운동이었다. 왕조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기득권들이 득세하던 그시기에 김옥균의 시도는 의미있는 일이었다. 당시 강국이었던 청나라와 일본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소수의 힘만으로 시대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희미하게 비석에 김옥균선생 유허지라고 적혀져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의 속마음을 알지 못한채 그들의 우호적인 부분만 보고 행동했던 김옥균은 친일파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19세기는 조선으로 보았을때 어둠의 시기였다. 담헌 홍대용같은 지식인도 등장하고 박지원, 박제가가 그 시대를 살아왔다.

 

 

 

김옥균 선생 유허는 1976년 12월 6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으며 1977년 김옥균 생애비를 화강석 지대에 오석으로 비신을 갖춰 이같이 세워두었다.

 

 

그의 생가가 남아 있지 않지만 김옥균은 진보적 정치가였으며 개혁파의 지도자였다. 스물둘에 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 정치 일선에 나서기 시작한 김옥균은 서양의 근대문물 수입을 위해 학교의 설치, 통신제도의 개선, 기예의 장려 등을 도모하면서 나라를 바꾸려 했지만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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